돌아오는 길에 백반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나태해지고 핑계가 늘어나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요즘은 지인들과 만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한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지만 삶은 이대로 흐릿하게 굴러가더니 점차 지속 가능한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아무렇게나 좋으니 팍 하고 끊겨 버리길, 다시 부활해 내길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나의 미덕이라 도무지 뭐든 끊어낼 수가 없다. 어쨌거나 돌파구가 필요하다. 삶이 지속된다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방안이 요구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기술이 필요하다. 2000년에는 건강한 음식에서 비롯된 건강한 신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칠전팔기의 정신이, 2010년에는 힐링으로 열심히 자위하며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요구되었고, 지금은 자존감이 주된 화두다. 내 생각에 쏟아져 나오는 자존감 관련 서적들은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실패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든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휴머니즘적 방안이다.
하여튼간 외부적 상황은 내가 목격한 바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나 우리의 마음먹기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보문고에서 열심히 싸구려 에세이를 사는 사람들은 내 눈에 모두 도인 내지는 행자行者 로 보인다. 자존감 높이기 수련은 아주 유용하고 또 실천적이며 진입장벽도 낮다. 그런 책들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인물 군상들을 분류하며 직장인들을 어르고 달랜다.("멍부상" 은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사의 줄임말이자 가장 피해야 할 위험한 인간 군상이다.) 나의 개차반스러운 행동거지로 미루어 보았을 때 대충 나 역시 자존감 수련법의 좋은 교보재가 된다. 어쨌거나 대부분 자기 개발서의 내용을 압축하자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스스로를 사랑하라. 타인이 던지는 감정 쓰레기를 주머니에 가지고 있지 마라." 정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은 그래야 팔린다. 그래야 의미가 있어진다. 그래야 지속된다. 일상생활을 가장하는 컨텐츠는 인기가 많다. 작위적인 브이로그를 볼 때면 난 기묘한 감정을 느낀다. 가지런한 이불, 정돈된 머릿결, 깨끗한 방, 빵빵한 치약, 물때 없이 새하얀 새 컵, 멋들어진 프랑스어 라벨이 붙은 와인들은 적어도 내겐 환상적인 것들이다. 평범한 생활이 세련된 광고처럼 둔갑해가는 것은 어쩌면 시대의 흐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냥 뭐 먹을만하다" 고 광고하는 햄이라거나 "자살하기 직전의 닭을 도축했다"라고 광고하는 닭고기의 출시를 바란다. 농담이지만 케이스에 폐암 환자의 사진을 당당히 싣는 담배가 차라리 나은 이야깃거리다. 그러하고 싶은 것과 실제의 그러함은 차이가 크다. 적어도 나는 이 간극을 오래 느낀다. 그렇다고 뭐 본질이라거니 진실이니 진짜를 원한다는 개소리는 삼가한다. 그저 나는 아주 묘한 기분이 든다.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해서, 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며 애써 외면하는 것들에 대한 물음이다.
음식 프로를 자주 본다. 대개 거기에는 음식들이 있다. 촬영장에서 몇몇 음식들은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먹을 수 없는 거에요. 윤기를 위해서 기름을 발랐거든요." "번들거리는 느낌을 원한다면 물엿 대신에 글루건을 사용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아, 이거요? 진짜 음식이 아니에요. 실리콘과 색소를 조합한 모조품이랍니다. 이렇게 하는 게 화면에 더 예쁘게 잡혀요."
나는 종종 이런 광고들을 튼 채로 밥을 먹는다. 환상적인 광고 음식들에 비해 내가 먹는 것들은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집에서 먹는 반찬은, "대충 눈대중으로 했는데 많이 남아버려 버리긴 아깝고 다음 끼니까지 미뤄서" 밥알이 뭉개진 군내 나는 밥과 "미역을 찬장에 한참 놔둔 것을 보고 국이나 끓여야겠다 싶어서 대충 수입 소고기나 냉동된 조갯살을 넣고 끓이다 보니 양이 생각보다 많아져서" 한 번에 다 못 먹고 반나절 정도 방치해 놓은 비린 미역국, "이거 하나 만들어 놓으면 앞으로 두어 달은 대충 때울 수 있겠다 싶어서" 만든 한 달 전의 쩐내 나는 장조림, "물엿 조절에 실패한 데다 냉장고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 보도블럭처럼 딱딱한" 멸치볶음 등이다. 모두 하나같이 냄새가 난다. 꾸릿꾸릿하고, 쉰내 나고, 비리고, 어느 정도는 상한 것들이다. 식자재의 유통 과정이 하나의 변명이 될 수 있다면 대부분은 그저 그런 먹을 만한 나물들과 그저 그런 밥, 그저 그런 반찬을 먹는다. 가끔 좋은 일이 있을 때 특식으로 살해되어 냉동되었다가 해동한 돼지를 익힌다. 외면하고픈 돼지의 단말마를 나는 '육즙이 좋구먼 이히히' 따위 감탄으로 읊어 야비한 비문悲文을 쓴다.
비리고 질긴 미역 찌꺼기들과 까슬한 멸치 대가리는 입에 오래 남는다. 보통은 밥을 수저로 떠 입 속에 밀어넣어 씹은 후 곤죽 상태로 만든다. 날것의 모양을 간직한 채 호화된 전분이 가지는 곡내가 거칠고 비린 것들을 부드럽게 만든다. 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은 언제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요즘은 그러한 말들이, 요즘은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도정된 것들이 남기는 어리둥절한 쌀의 유언으로 들린다. 학창 시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꼭꼭 씹어 삼켰고 선생은 엄숙한 표정으로 쌀 한 톨에 농부의 허리가 팔십 번 굽는다는 소리를 지껄였다. 아직 급식을 교실에서 먹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벌건 양념이 덕지덕지 묻은 떡진 밥 덩이들을 당번 몰래 잔반통에 쓸어 넣고 나서야 선생이 말한 농부의 허리 어쩌구 팔십 번 어쩌구가 문득 생각이 나 죄책감에 몸을 부르르 떨곤 했다. 이런 비극은 파스타나 중화면 따위가 제공할(?) 수 없는 주술적인 영역에 있다. 먹는다는 것은 때로 비참하고 또 곤욕이다.
예전에 일여 년 간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주 업무는 스뎅 식판에 담아 나오는 밥과 반찬들을 가위로 잘게 잘라 비빈 후 치매 노인들의 입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노인들은 때로는 씹던 것을 뱉기도 하고, 먹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쟁과도 같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면 요양 보호사들은 하나같이 '넘겼어, 간신히 넘겼어',라고 허리를 뿌드득 펴며 중얼거린다. 노인들이 음식을 모조리 목구멍으로 넘겼든 혹은 전쟁 같은 점심시간을 무사히 넘겼든 간에 넘긴 것은 넘긴 것이라 복기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이라 생각한다. '넘기라! 넘기라! 춘애 어르신 언능 넘기소! 입 벌리라!" "싫다! 넘기기 싫다 누애야! 누애야! 하나님!" (누애가 과연 누구인지는 요양원 직원들 사이에서 몇 가지 전설들만 떠돌 뿐 밝혀진 사실은 없다.) 냉동 동그랑땡과 물에 젖어 축축한 북어포와 같은 것들이 스뎅 식판 위에서 한데 섞여 내는 악취는 끔찍하다. 노인들은 때때로 씹다기 반쯤 곤죽이 된 것들을 내 얼굴에 뱉곤 했는데, 한참을 씻었는데도 날숨에서 악취가 났을 때부터 나는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던 저렇게 생각하던 끝없이 맛있는 것들을 탐식하는 짓거리는 오래오래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에게 맛집을 소개해 달라, 혹은 음식 맛이 어떤지 견해를 알려 달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백반은 말리기, 발효시키기, 삭히기, 찌기, 우리기, 졸이기 등의 한식 기술이 모두 들어가 있는 동시에 한국인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는 장르다. 백반은 정식과 구분된다. 정식은 제대로 된 식사라는 의미의 일본어 번역인데, 만약 일본에서 단품 메뉴를 주문할 때 정식으로 달라고 요청하면 밥과 된장국이 추가로 나온다. 대부분의 단품 메뉴에 정식 추가가 가능하다. 만두 정식을 주문한다면 만두에 밥과 된장국을 더한 만두 정식이, 야끼소바 정식을 주문하면 말 그대로 야끼소바에 밥과 된장국을 더한 야끼소바 정식이 된다. 그러나 단품의 메뉴가 중심이 되는 정식과 달리, 백반은 어디까지나 공깃밥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제육볶음 따위처럼 근사하게 중심이 되는 반찬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경우 메뉴의 이름은 제육볶음이라거나 제육볶음 백반이 될 것이다. 아주 보통의 백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런 호화로운 반찬들은 제외시켜야만 한다.
즉슨 밥과 국, 그리고 밥상의 메인으로 삼기에 볼륨감이 부족한 비-단백질 반찬 여러 개를 밥상에 적절히 올리는 것이 백반이며, 어떤 반찬과 국이 나오느냐는 주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래서 백반에는 무엇이든 올라올 수 있고, 무엇이든 올라오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명란젓이나, 굴젓, 두릅 따위는 밑반찬으로 제공하기에는 단가가 높고 단품으로 메뉴에 올리기에는 볼륨감이 부족하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동시에 이윤도 얼마 남지 않는 찬들이 백반에 올라간다. 당연히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데, 백반은 외식경영학보다 역사가 깊기 때문이다. IMF 이후 불타오르며 발전한 외식경영학은 최소한의 노동력과 최소한의 원가로 최고의 음식을 내놓는 법을 파악했다. 구시대의 유물이 될 위기에 처한 백반은 살아남기 위해 보다 푸짐하고 화려하게 변하는 쪽을 택했다. 바닷가 관광지에서 흔히 내놓는 1인 15000원의 회정식 따위는 시장 백반을 모태로 발전해 왔는데, 인원수에 맞게 주문하면 상이 부러져라 신선한 해산물들이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백반은 공단의 허름한 식당이나 시장의 더러운 밥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백반을 만나려면 딱히 특산물이랄 게 없는 어중간한 소도시의 그리 크지 않은 시장에 가야 한다.
백반을 백반답게 만드는 것은 소박함에 있다. 백반은 먹을 만한 것에 목적을 둔다. 만드는 쪽이나 먹는 쪽 어느 누구도 백반의 반찬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매 계절마다 나오는 재료들을 당연하다는 듯 시장에서 사 와 늘 그랬던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주인의 몫이고, 늘 그래 온 음식을 불평 없이 먹는 것이 손님의 몫이다. 그래서 백반은 최고의 맛이라거나 진미 따위의 말로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는다. 백반 먹기는 먹고 산다는 것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다. 그것은 함바를 목구멍으로 삼키는 인부들을 연상시킨다. 그곳은 어떤 미식이나 고상함, 세련됨의 지표 없이 사람과 음식만이 존재하는 진공의 영역이다. "친절한 금자씨" 후반부에서는 식탁에 앉아 무미건조하게 반찬과 밥을 씹는 최민식이 등장한다. 나는 그 장면이 보여주는 벌거벗음을 너무도 좋아해서 혼자 있을 때 여러 번 돌려 보곤 한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서 나는 언제나 어떤 악취를 맡는다. 먹고산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챗구멍과도 같은 악취다. 먹기는 이 진공의 공간 틈새에서 풍기는 악취로부터 출발한다.
맛을 느끼는 데 있어 언제나 더욱 주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향이다. 향은 범주에 있다. 정체성을 포함하여 수많은 실체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에게 이름이 붙여지지만, 향은 그중 가장 실체가 모호한데도 불구하고 가장 확고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향이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범주라는 것이다. 향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는다. 또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채색하여 보다 덜 체계화시켜 재구성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필요하다면 허구의 기억들도 허용된다. 물론 원한다면 가장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향을 정의 내릴 수도 있다. "베이스로 오크 향과 체리 향 약간, 미들에는 숙성된 럼 향, 그리고 피니쉬로는 묵은 곰팡이와 견과의 향이 나는군요" 따위의 표현으로. 그것은 분명 사실에 가깝지만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음식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며 우리에게 표현하도록 종용한다. 또 맛있음과 없음의 이분법적 굴레로부터 벗어나가는 것을 표현하도록 요구한다. 맛은, 나아가 향을 포함한 총체적인 풍미(Flavor) 일체는 거짓된 세계에서 떠도는 구전된 모든 것들과 현재를 사는 우리를 매개한다. 음식에 대해 말함은 음식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야기되는 음식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밝혀짐의 가능성이 있는 음식이다.
나는 종가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가해자다. 일 년에 네 번씩 제사 때마다 당연한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서른 가지의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는 일이 내 유년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언제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만 과중되었기에 나는 그 사람들의 허릿살을 먹고 자란 사람이다. 시대가 변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제사상의 음식 가짓수는 퍽 줄어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더 이상 제사상에 올라가지 않는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엄마는 지금은 사라진 상어 묵이나 화전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그런 음식들을 다시는 만들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때때로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리며 왁자지껄했던 큰집을 회상하는 듯했다. 엄마에게 그 집과 음식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는 "그랬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구나" 정도의 짧은 회상 정도에 불과하다.
제사 후 음복하기 위해 상에 올린 화전이라거나 상어 묵은 실은 영남 사투리로 만들어지고 고향의 집은 그 음식들 위에 세워졌다. 아주 오래된 제기第器들 중 놋으로 만들어진 쟁반에는 늘 조상신이 머물러 있다. 나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나 일설에 따르면 그들은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고 했다. 제사에서 밥공기를 열고 삽시揷匙할 때면 나는 본 적도 없는 내 조상들의 얼굴을 상상한다. 그러한 방식으로의 살아있음이 조 씨 가家 를 지탱해 왔고 또 지탱해 올 규범의 유효한 방식으로서 있다. 그래서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주변을 떠돌 수밖에 없는 역운에 갇힌 상태다. 화전이나 상어 묵은 나를 진공의 공간으로부터 끌어내어 낡고 오래된 나무 상 앞에 앉혀 놓는데, 집안의 어른들만이 앉아 겸상할 수 있는 그 상에서 나는 보통 침묵한다. 문서화된 소문들과 돈에 대한 전설들이 밥상머리의 오래된 화두들이다. 그런데 돌이키면 얼마나 많은 전설들이 있었나. 2005년에 실수로 지붕 위로 넘어가버려 잃어버린 싸구려 플라스틱 로봇의 머리의 행방은 소문만 무성할 따름이다. 어린 나는 울고 불고 로봇 머리를 찾아달라고 온갖 땡깡을 부렸으나 겨우 식은 화전 두어 개로 달래져 버려 그만 배시시 웃고 말았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옥상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집에 살던 백구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백구는 나만 보면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 방방 뛰며 나를 반겼고, 나도 어른들 몰래 장조림이나 진미채 등의 반찬을 옥상 너머 던져 주곤 했다. 어느 날 백구는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는데, 누군가는 백구가 가출해 들개 무리의 대장이 되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복날에 죽었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그가 새로운 가족을 찾아 목줄을 풀고 몰래 떠났다고 했다. 나는 백구가 열 밤 자면 돌아올 줄 알고 제사 때마다 맞은편 집을 기웃거렸지만 결국 백구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른들은 조상들을 모시기 위해 말없이 독한 향을 피웠다.
나는 종종 외로워서 혼자 글을 쓰고 또 그걸 평론한다. 그러면 좁은 방 안에서 수많은 냄새들을 맡을 수 있다. 비리고 역한 것들, 나는 종종 코를 감싸 쥐지만, 신선한 재료로 만든 훌륭한 음식을 먹는다 해도 내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씹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먹는다는 것으로부터의 비애감을 충실히 느끼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나를 아주 천천히 파괴시키는데, 이 과정은 의외로 건설적인 데다가 굉장히 천천히 진행되어서 기쁨보다 나를 더 오래 살아있게 만든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성공의 의지는 건강한 신체와 뒤틀린 자아를 동시에 제공한다. 그 틈바구니에서는 잊혀진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많은 내 친구들이 그렇듯 나 역시 그 틈새에서 허우적거린다. 비극적이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건강한 신체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변명하자면 마치 물고기와 이야기하기 위해 믈 속으로 들어가듯, 나 역시 다소 야비한 방법론을 가지고 나타날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외로워진다. 삶이 지속된다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방안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