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과 섬유질과 오랜 여행
오렌지는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 잘 자라는 여름 과일이다. 태양의 채도부터가 다른 이국의 땅에서, 또 다른 이국을 고향으로 둔 노동자들의 손으로부터 오렌지는 생산된다. 내 나라는 그것들을 대량으로 수입하고 내 동네 명륜의 슈퍼 체인점은 또 그것들을 대량으로 사고 나 역시 그것들을 사서 쟁여둔다. 아마도 현지에서는 여섯 알에 백 원쯤 하는 것이 배를 타고 남해에 도착하면 천 원쯤 되고 트럭에 실려 명륜의 슈퍼에 도착하면 사천 원이 된다.
나는 늘 멍이 든 오렌지를 산다. 그런 것들은 매대의 한구석에, 스티로폼 팩에 비닐이 감싸진 채로 팔린다. 여섯 알에 천 구백 원인데 여섯 알을 모두 까서 못 먹는 부분을 모으면 한 알 분량이 나온다. 그러니까 다섯 알의 온전한 것을 천 구백 원 주고 사는 셈이다. 오렌지는 달고 청량해 목구멍에 낀 세속의 기름때를 모두 씻어낸다. 비록 오렌지가 다국적 기업의 거대 농장에서 온 현대 유전공학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게는 이 이국의 과일이 필요하다.
오렌지의 껍질은 질기고 튼튼하다. 먹다 남은 껍질이 하루 정도 상온에 방치되면 흡사 동물의 가죽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이 튼튼하고 질긴 껍질과 풍부한 섬유질 탓에 오랜 여행길에서도 쉽게 상하지 않는다. 나는 오렌지 주스가 가장 대중적 종류의 주스가 된 것이 이 보관과 이동의 용이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즙을 짜기 좋은 과일, 착취하기 좋은 과일이다. 어떻게 보면 버티는 삶의 대선배격이랄까.
오늘은 새벽 다섯 시에 오렌지를 사러 나갔다. (나는 지독한 야행성이다) 팩에 든 멍든 오렌지를 익숙하게 챙겨 계산하고 나오는 길에 낯선 남녀 두 명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그래요 무슨 일이죠 하니 태블릿 PC를 꺼내 들어 즉석 발표를 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정체는 PPT 두 장을 넘길 때쯤 드러났는데 (논란이 많은) 모 종교 단체에서 길거리 포교차 나온 청년들이었다.
어쨌거나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설명을 이어갔고 그 탓에 매몰차게 자리를 뜨기 어려웠다. 사랑, 평화, 말씀, 복음, 무슨 이야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추위로 곱은 손이 거칠어 보였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 참가하시겠어요. 뭐라구요. 행사에 참여하셔서 좋은 이야기 듣고 가시겠냐구요. 대답 대신 손에 오렌지를 하나씩 쥐여 보냈다. 그들은 어디론가 터덜터덜 걸어가 버렸고 불현듯 순례자인가. 순례자가 저런 모습이었던가. 새벽 다섯 시부터 스스로 깨달은 바를 타인에게 전하는 마음이 구도의 길인가. 어쨌거나 한 손에 오렌지를 꼭 쥔 채로 그렇게 떠났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의 껍질은 지독히도 질기고 단단하고 뻔뻔해서 오렌지처럼 쥐어 줄 수 있는 것이 된다. 여행을 오고 가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또 이쪽에서 저쪽으로, 별 의미가 없더라도 그렇게 떠돌아다니고 때가 되면 벗겨지고 착즙된다. 구도하는 이든 돌아오지 않을 탕아든 모두가 그렇게 이 거리 위에서 웅크린 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비슷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열심히 오렌지를 먹고 느끼한 것들을 씻어내고 열심히 살 것인데 한 십 년쯤 뒤 부끄럽지 않냐고 물으면 과즙이 섞인 달콤한 침을 튀기며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중요성을 지독한 속물처럼 마구 뱉어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