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소 즐겨 먹는 이북 음식은 몇 가지나 될까?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라는 평양냉면과 만두, 어복쟁반과 녹두빈대떡, 김치말이국수와 찹쌀순대는 누구나 친숙하게 떠올리는 북한 음식이다. 분단의 아픔이 켜켜이 스며든 고향의 맛은 누군가에겐 애틋한 향수를, 어떤 이에겐 간절한 염원을 달래주는 소울 푸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갑갑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풀어주는 평양냉면부터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는 따뜻한 온반까지 겨울철, 입맛 살리는 서울 도심 속의 북한 음식들을 찾았다.
겨울철에 제맛인 ‘동무밥상’의 명태식해
시원하고 깔끔하게 입맛을 사로잡는 이북식 냉면과 국수
이북 음식 하면 단박에 평양냉면이 떠오른다. 평양냉면은 누구나 먹을 수 있지만, 아무나 좋아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밍밍하다고 느껴질 만큼 맑은 육수에서 진한 육향의 매력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치아로 자르는 것이 아니라 목젖으로 끊어 먹는다는 메밀의 부드럽고 구수한 맛까지 음미할 만큼 미식가로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맹물처럼 심심했던 육수가 문득 육향을 품은 최상의 국물로 느껴질 때, 평양냉면 중독은 비로소 시작된다.
맑은 고기 육수가 입맛을 사로잡는 ‘능라도’의 평양냉면
평양냉면은 의정부와 을지로, 마포 등 손가락에 꼽는 맛집이 수두룩하지만, 신흥 평양냉면으로 떠오른 곳이 있다. 역삼동에 문을 연 ‘능라도’의 평양냉면은 한우 사태와 양지, 설깃 등 최상의 소고기와 암퇘지고기로 육수를 내는데, 고기 특유의 구수한 향과 달큼한 맛이 미각을 매료시킨다. 느끼한 맛을 줄이기 위해 동치미 국물을 살짝 섞어 육수의 완성도를 높였다. 매일 반죽하는 메밀은 전날 찧은 메밀가루만 써서 신선한 메밀의 풍미를 놓치지 않았다.
살얼음이 동동 뜬 겨울 별미, ‘하단’의 메밀냉칼국수
평양냉면보다 쫀득한 식감에 반하는 성북동 ‘하단’의 메밀냉칼국수도 있다. 성북동에서 20년 넘게 이북 음식을 만들어온 주인장은 평안남도 하단이 고향이다. 이북이 고향인 단골들의 발길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유다. 소고기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적절히 배합한 맑은 육수는 한 모금 마셔보면 단박에 반할 만큼 시원하다. 아삭한 백김치와 매콤한 청양고추, 오이채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겨울에는 맑은 육수에 깔끔하게 끓이는 만두전골도 인기다.
김치 국물이 알싸하고 시원한 ‘리북손만두’의 김치말이국수
무교동에서 이북식 손만두로 30여 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리북손만두’는 김치말이국수가 유명하다. 5대를 이어 사는 한옥은 옛집의 운치가 남아 있어 음식 맛이 살아난다. 겨울에는 찬밥을 말아 김치말이밥으로, 여름에는 칼국수 면을 넣어 김치말이국수로 먹는다. 김치말이국수의 기본 재료인 김치는 사골 육수를 넣어 버무리고 숙성시켜 국물이 진하고 구수하다. 살얼음이 동동 뜬 김칫국물에 넣은 칼국수는 탱글탱글해서 알싸한 육수와 함께 식감이 탁월하다.
매콤한 간자미회무침이 쫀득한 ‘오장동 함흥냉면’의 회냉면
오장동의 대표적인 메뉴인 함흥냉면도 빼놓을 수 없는 이북 음식이다. 60년 이상을 지켜온 함흥냉면의 산증인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흥남집’과 ‘오장동 함흥냉면’집은 알싸한 홍어회와 간자미회무침을 각각 얹어 내는 매콤한 비빔냉면으로 사랑받는다.
특제 간장소스로 맛을 내는 흥남집의 회냉면
어복쟁반, 온반, 만두, 녹두전 등 추운 겨울에 사랑받는 북한 음식
어복쟁반은 놋쟁반에 갖가지 고기 편육과 채소를 푸짐하게 담아 육수를 부어가며 여럿이 끓여 먹는 전골이다. 인정 많은 평안도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며 즐겨 먹던 요리라고 한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남포면옥’은 100년 된 한옥이 식당이다. 식당 입구에는 동치미 항아리가 제조 날짜를 적은 팻말과 함께 땅속에 묻혀 있다. 매일 담그는 동치미는 15일간 숙성해서 냉장했다가 손님상에 내는데, 무와 대파, 고추가 만들어내는 단순하고 개운한 맛이 쨍하게 시원하다. 3대에 걸쳐 50년 동안 오는 단골들은 옛날 고향에서 먹던 평양냉면 맛을 잊지 못해 남포면옥을 찾는다.
한우어복쟁반은 양지머리와 유통, 두 가지 수육으로 푸짐하게 꾸며진다. 맑은 양지육수는 무한 리필이라 보글보글 끓이며 천천히 음미하는 즐거움이 있다. 따뜻한 국물을 떠먹으며 고기를 양념장에 찍어 먹는데, 버섯과 쑥갓을 곁들여 먹다 보면 느끼함도 사라진다. 고기만두를 추가해서 끓여 먹기도 하고 메밀면을 끓여 부드러운 면을 즐겨도 좋다.
편육과 채소, 버섯 등을 함께 먹는 ‘남포면옥’의 어복쟁반
겨울에 인기 있는 평양온반은 역삼동 ‘능라도’에서 손꼽는 메뉴다. 맑은 육수는 소고기와 닭 육수를 섞어서 쓴다. 온반에 꾸미로 올리는 녹두전은 따뜻한 육수에 적셔 먹는 맛이 부드럽다. 100% 국산 녹두와 돼지고기 간 것, 숙주, 백김치를 넣어서 노릇노릇하게 부쳐내서 별미다. 온반에 꾸미로 올린 녹두전을 맛보면 결국 녹두전을 주문하게 되는 마력이 있다.
맑은 고기 육수가 담백한 ‘능라도’의 평양온반
아이 주먹만 한 이북 만두도 빼놓을 수 없다. 두부, 숙주, 백김치, 대파, 부추, 간 돼지고기 등 재료의 비율을 정확하게 지켜서 만들어 폭신하고 촉촉하다. 돼지고기 살과 비계의 알맞은 배합 덕분에 만두라기보다 케이크 식감처럼 부드럽게 느껴진다.
북한 음식의 새로운 별미를 만나고 싶다면, 새 친구 <동무밥상>
평양 옥류관 출신의 주방장인 윤종철 씨의 ‘동무밥상’은 합정동에 문을 연 지 이제 1년이다. 우리 입맛에 익숙한 이북 음식 말고 색다른 북한 요리를 만날 수 있어 주목받는 곳이다. 점심시간이면 웨이팅은 기본이고 종일 손님으로 북적인다. 이 소박한 식당을 찾는 손님의 연령층은 의외로 높지 않다. 30~40대 직장인들이 단골인데. 주인장은 북한 음식이라기보다 건강밥상을 찾는 손님들이라고 답한다.
쫄깃하게 삶아낸 소면에 쭉쭉 찢은 오리고기 꾸미를 올린 것 말고는 맑은 육수가 전부인 오리국수만 해도 그렇다. 비주얼은 서운할 만큼 간단한 오리국수이지만, 국수 한 젓가락과 국물을 들이켜면 아쉬움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맑고 깔끔한 육수만으로 국수 가락이 술술 들어간다. 동무밥상의 건강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이다. 오리와 무, 대파, 양파에 된장을 살짝 풀어 맑게 끓여내는 오리탕 육수는 국밥과 국수를 모두 담백하고 시원하게 담아낸다.
단순함의 미덕이 느껴지는 담백한 오리탕
오리고기는 볶음으로도 인기다. 설탕과 식초로 하룻밤 재워 잡냄새를 잡는데, 이렇게 담백한 조리법은 순수하게 재료의 맛을 살리는데 중요하다고. 동무밥상의 음식은 모두 주인장이 직접 만든 수제 간장과 된장으로 간을 맞춘다.
북한음식의 특징이 살아있는 오리고기 볶음
찹쌀순대는 간 돼지고기, 배추, 대파, 깻잎을 넣어 누린내를 잡고 쫀득한 찹쌀이 넉넉히 들어가 입에 착착 붙는다. 돼지머리를 통째로 갈아서 만든다는 이북식 정통 순대는 아니지만, 쫀득하게 씹는 선지 찹쌀 맛이 일품이다.
찹쌀이 들어가 쫀득한 맛의 찹쌀순대
동무밥상의 김치는 이북식으로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시원하고 깔끔하다. 김장김치는 6개월 치를 공들여 담는데, 김장김치가 끝나갈 즈음 즐겨 먹는다는 콩나물김치도 아삭하고 시원하다. 매콤하게 담근 명태식해는 낯선 북한 요리이지만, 특유의 감칠맛에 자꾸만 젓가락이 가는 음식이다. 북한 음식의 정통 레서피로 만든다는 북한 음식의 담백함에 반해서 단골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