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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 May 29. 2019

[수요_킨포크] 백수만끽

뽀로로 왈 "노는 게 제일 좋아"

미국에 오면서 백수가 되었다.

손에 뭐 묻히며 일 할 필요 없이 깨끗한 흰 손...

 

그래서 이제 내 일상은 작디작은 '개미' 같고,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없는 '개미'인생과 같아졌다. 


2018년 12월

'여유'라는 듣보 세상에 표류한 나는 진정한 패닉을 맛보았다.

 

아~무 것도 없는 전.무한 세상. 무인도와 다를 바 없는 이 곳.

CG25, 이자까야, 스타벅스, 올리브영, 곱창집...하다못해 시청, 부동산, 약국 모두 안보인다. 


심심한데 난 어디 가서 놀아야 되는 것인가!

지금 딱! 새우깡이 먹고 싶은데 어디까지 가야 살 수 있는 것인가!?

화장품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데 샵.. 어딨는 거니?


사방팔방이 나무로 둘러 쌓여 있고,

길 끝에는 언덕과 바다가 나를 막고 서 있는 이 곳.

무인도 표류라 할 만했다.  



여행으로야...

퍽퍽한 일상에 한줄기 기름칠이라며 한껏 만끽했을 텐데

살려고 와, 하루 종일 탱자탱자 있자니 툭 건들면 우수수 투척되는 '시간'과 '고요'가 지긋지긋해

한동안 좀.... 힘들었다.


이 복잡한 감정을 비교해본다면 

평생 객관식만 풀다가 난데없이..  "행복이란 무엇인가?" 질문에 A4용지 10장 서술하시오...라고

쓰여 있는 시험지를 받은 느낌?!

헉! 어쩔?


하루가 24시간인데

8시간 자니까 16시간 깨어있고, 거의 대부분 예연이 케어한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남아!


막연함 속에서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보니 어차피 남는 시간 그동안 못 했던 것들 다 해보자! 는 결심이 섰다.


못해본 거 하면 독서지!

책을 펼쳤다.

5장 읽었다.

그런데 어쩐지 불안불안 해진다.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되나?

대낮 이 소중한 시간에 고작 이런 여유를?

뭐 중요한 걸 빼먹은 것 같은데.. 할 일 없나?


그러다 책을 내려놓고

꼭 해야 하는 일인 청소를 하자! 해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으면

거실 다 하고 안방쯤 들어왔을 때 또다시...


아.... 청소 빨리 해치워 버려야지.

이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런 데 지금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거야?

더 중요한 일 뭐 없나...?


이렇게 마땅히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도

조급증 + 불안증이 강박적이 되면서 초조함이 느껴지고

더 다른 거! 지금 이거 말고 더 중요한 거! 에 집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이런 일들은 일에 치여 늘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섭외 전화를 해야 한다던가, 회의 준비를 해야 한다거나 무조건 일이 우선이었다.

독서? 집안일? 내 하루에 1/10의 시간도 차지하지 못했던 하찮은 것들이었다.

(독서는 남는 시간 틈틈이 쪼개서 간절하게 읽어야 하는 행위였으며)


그런 사소(해 보이는)한 일로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보다 더 충격인 현실은

그런 일들 말고는 결국에 별.다.르.게. 할. 일. 이. 없. 다.는 것이다.


결국 실체가 없는 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지금 내 할 일도 못하고, 여유도 못 누리고

현실에 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천에 과일이며 크랩 등이 넘쳐나는데 엘도라도인 줄을 모르고

전쟁통이 천국이라며 그리로 가서 다시 살겠다고 바둥거리는 어리석은 내 모습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떨어진 몸..  

이쪽 현실에 맞춰 살아야겠다고 두뇌 회로를 변경했더니 정말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 투성이 되었다.


단지 내 일상으로만 보자면


언제 일어나도 상관없는 기상시간 (예연이 덕분에 8시에는 깨야하지만)

언제 씻어도 상관없는 샤워시간

언제 먹어도 상관없는 밥

언제 자도 상관없는 취침시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무한히 때릴 수 있는 멍 타임.  

모든 행위 속에 멍이 존재한다.



커피 마시면서도

급하게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커피 한 모금을 호로록 마시며 무한한 쓸데없는 생각.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아닌 생각. 생각도 아닌 멍.

그런 것들의 재미를 배우게 되었다.


커피가 지겨울 때는 생강차를 마신다. 

뜨거운 물을 끓이면서, 생각차를 타고 꿀을 타면서

행동 하나하나가 느리고 조용하지만

왠지 이런 행위들이 참 마음 따듯해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청소를 하면서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 대신

천천히 구석구석 먼지를 들여다보고, 유난히 먼지가 잘 끼는 곳에서는 천천히 더 꼼꼼하게

발매트를 들어 올리고 한 번, 발매트 툴툴 털고, 내려놓고 다시 한번

청소만을 하면서 깨끗해지는 집과의 교감도 배우게 되었다


2살 딸과 손잡고 집 앞 공원에 나가 꽃들을 만지고,

색깔들 알아맞히고

흙 위에 누워서 햇살 맞고

이 여유가 고마운 것임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GS마트, 올리브영이 코 앞에 없어도 불안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들이 집 안에 가득하고, 집 근처에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적응을 꽤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젯밤에 문득 깨달았다.


어젯밤, 가로등 불도 없는 깜깜한 8시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려 나갔는데

스산한 느낌이 들었던 바람이 상쾌한 느낌으로 변해 있고

멀~리 보이던 야경이 부러움 대신 멀리서만 보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느끼고 있는 날 보면서


아... 이제 좀 적응한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여기

행복하다

아름다운 시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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