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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 May 29. 2019

[수요_킨포크] 백년해로각

남편을 향한 뭉클함 

기분의 원인은 모호하다.

왜 특정한 기분이 드는지 도통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날의 날씨, 밤사이 꾼 꿈, 피부에 닿는 공기의 느낌, 문득 마주친 누군가의 눈빛..." 


찰나를 스치는 수많은 경험치들이 쌓이고 쌓여 기분을 만들어 내니 그 원인은 일일이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기분 어떤지 설명할 때 "왠지.... 00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보다. 

'왜인지' 딱히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기분이 00 하니까 말이다. 


낮에 아이와 수영을 하고 들어와 젖은 수영복을 널고 있는데 갑자기 "왠지! 뭉클해졌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5월의 한 낮.  

수영까지 신나게 한 판 하고 들어와서 아이는 낮잠을 자고 이제부터 자유시간만이 기다리고 있는 그때 

'뭉클한 기분'이 드는 건 누가 봐도 뜬금없는 감정일 것이다. 

나 역시 뜬금없이 왠...?이라고 생각하면서 뭉클함의 원인이 된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는 주말인 오늘도 일을 하고 있다. 


"갑자기 오빠 생각이 났는데 슬퍼. 가족 먹여 살리려고 매일 고생하고 우리 엄청 신경 써주고...(어쩌고 저쩌고)" 


요즘 휴일 출근이 많아 오늘의 근무도 특별할 것 없는데 오늘 유독 짠했다. 


내가 뭉클하고 짠한 기분이 든 건 여러 우연이 겹쳐서 그랬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지난밤 꿈. 

지난밤에 오빠는 온데간데없었고, 나와 딸만 엄동설한에 셋방을 알아보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 


(삼천포 1. 나처럼 꿈 많이 꾸는 사람도 있을까? 

꿈 꾸기도 유전인진 몰라도 내 동생과 나는 꿈을 5~6개씩 꾼다.

아침에 인사말이 "내 꿈 얘기 좀 들어볼래?"일 정도이다.

내 꿈은 정말 재미있는데 남의 꿈 얘기 듣기는 정말 힘들어서 -뭐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있나- 내 꿈 들어보겠냐는 모닝 인사는 반갑지 않다. 하지만 일단 하나 들어야 내 꿈 얘기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 없이 듣고 있곤 한다) 


지난밤 꿈에 나와 예연이는(딸) 엄동설한 길에서 쫓겨났다. 

눈 쌓인 골목길. 눈 표면이 얼어서 계속 미끄러운 그 저녁 길을 걸으며 셋방을 알아봐야 했다. 

갑자기 친정 엄마가 우리를 한 지인 집에 부탁을 했는데, 그 지인 집에 가보니 단칸방에 애가 다섯이 있었다. 

그 지인 부부에게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이 든 데다가,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하러 나가야 되는데 

예연이를 어떻게 놓고 갈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인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 드르렁 코 골고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며 굉장히 든든했다. 안도감을 느꼈다. 

코 고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은 짜증스러운데 고작 꿈 때문에 남편에게 든든함을 느끼다니. 



꿈에 이은 두 번째 우연. 오빠의 질문 하나였다. 

평소처럼 오빠가 샤워하고 있을 때, 나와 예연이는 또 다른 화장실을 사용해도 되는데 굳이 샤워 커튼 뒤 오빠의 씻는 소리를 들으며 거울을 보고 놀고 있었다. 

(오빠는 씻고 나와서 제발 좀 비켜줄래? 라며 귀찮아하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다.) 

오늘도 제발 좀 나가 달라고 화장실을 넘어 거실까지 우리를 쫓아내면서 

"내가 왜 좋아?"라고 오빠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더니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오빠의 장점들을 곱씹으며 이 사람 참 대단하다, 고맙다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진 또 다른 우연은 나의 건망증에서 시작된다.  

나는 갑자기 올해가 18년인지 19년인지 헷갈렸다.

18년이면 나는 38살일 것이고 19년이면 나는 39 살인 건데 설마 19년...? 

두둥... 그로써 내가 39살이나 먹었다는 것을 재확인하며 새삼 놀랐고, 내년에 마흔... 마흔... 

마흔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도대체?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오빠가 우리가 처음 만난 24살을 지나 내년이면 딱 20년 후인 44살이 된다는 지점까지 생각이 다달았다. 

3땡 아닌 4땡.... 중년이라니... 

문득 와 닿은 오빠의 삶의 무게도 내가 젖은 옷을 널며 느낀 뭉클함의 이유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떠 오른 오빠의 어젯밤 멘트 

"나는 참 이상한가...? 밖에 나가면 집에 빨리 오고 싶어" 

"나는 취미가 없어. 그냥 너랑 예연이가 행복한 게 제일 좋아" 


자주 하는 말이라 고맙지만 '귀한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그냥 너랑 예연이가 행복한 게 제일 좋아" 이 말을 곱씹어 보니 

가족을 위해 살고, 가족의 행복이 인생 목표, 삶의 의미라는 말이 아닌가? 


오버스럽지만 약간 '홀리'함을 느꼈다. 

한 남자의 인생이라니... 


학교 다닐 때 꽹과리를 하도 치고 다녀서 별명조차 '꽹'으로 불리던 취미 부자인 한 남자가... 

또 여자 친구가 있는데도 하도 여기저기 술자리에 빠지지 않길래 "저 오빠는 여자 친구랑 안 놀고 맨날 저렇게 술 마시고 다니네. 여자 친구가 정말 싫어하겠다~"(그때 각자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었음) 했던 문제적 남자가... 

취직해서는 밤, 낮, 주말도 없이 연락할 때마다 일 하고 있다길래 집에는 가나...? 싶어 미래의 부인이 누굴지 불쌍했던 워크홀릭 남자가... 


내 남편이 된 것이 신기한 건 둘째 치고, 이렇게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다니 

정말 신기하고 대단한 일 아닌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정에 올인하는 그. 

(삼천포 2. 크..... 이 정도면 가끔 영접하는 '개꽐라'도 너무 뭐라고 하지 말고 좀 봐줘야지.. 싶다.) 


전날 밤 꿈에서부터 느껴오던 오빠의 노고들이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  여유를 만끽하는 순간에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나는 오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뭉클해졌다. 


아... 어른들이 말하는 부부의 정, 의리라는 게 이런 건가? 


어렸을 때는 두근거림 없는 사랑을 우습고 답답하게 생각했다. 

"다~ 정으로 사는 거지" "의리야 의리!"라고 투박하게 뱉는 말들을 들으며 

"쯧쯧... 이번 생은 다들 망하셨군. 진정한 사랑 한 번 못해보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거친 말속에 사실은 부끄러워 말하지 못한 뜨거운 진심이 있었다는 걸 미쳐 보지 못했다.  

고마움. 믿음. 책임감. 역경을 이겨낸 시간.  

일일이 말하기 어려워 '정' '의리'로 치환해버리지만 어쩌면 사랑을 초월한 무언가일 듯 싶다. 


조금 후면 지금의 뭉클함도 고마움도 또다시 무뎌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기분을 느낀 이 순간을 

진하게 남기기 위해 글을 써 본다. 


삼천포 결론 1. 남편 자랑 끝~~~! 

삼천포 결론 2. 문득 저녁에 고기를 먹으러 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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