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만 산다"
오늘 딸과 공원에서 놀고 있는데 영혼이 1도 없던 그 와중에 갑자기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뿅 날아들었다.
"만약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기온 18도. 적당히 따듯하고 습도도 쾌적. 구름 없이 청명한 그 오후.
눈물이 핑 돌았다.
1초 만에.
내가 틀어준 수도꼭지 물에 모래 묻은 발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씻고, 그리곤 다시 모래를 잔뜩 묻히고 와 발 닦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는 딸. 그 모습이 어찌나 뭉클하던지 수도꼭지를 갑자기 열심히 틀어 주었다. 수도꼭지... 뭐 열심히 틀 것도 없지만 짝다리를 짚고 있던 자세를 반듯하게 한다던가 , 수도꼭지 잡은 손을 성의 있게 힘을 더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열심히 물 틀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지치고 지쳤을 밤 10시까지 신나게 놀아주었다.
근데 딸이 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 왜 이래...'
왜냐하면 그림을 그려달라고 성화를 해도 한참 했을 텐데 나의 열정에 밀렸는지 그냥 나 하는 오버를 지켜만 봤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가 눈시울을 붉힌 오늘 대낮.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되짚어 보니 전날 봤던 기사 하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국만리에서 연예 뉴스만은 꼭꼭 챙겨보는데 백상 예술 뭐시기에서 김혜자 님이 대상을 수상했다는 기사가 나의 심금을 때린 주인공이었다.
그녀가 수상소감으로 드라마 대사 중 일부를 다시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마지막 구절
"오늘을 사세요. 눈이 부시게"
어머! 다시 또 찡할세!?
기사를 보면서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메모를 즐긴다.
그래서 남자 등짝만 한 대왕 노트부터 손가락만 한 미니 수첩까지 가짓수가 참 많다.
노트들은 모두 각기의 용도가 있으며 내가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최애하던 것은 단어장 용 미니수첩이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한 줄, 두줄로 짧게 적는 용도의 수첩이었다.
그때 그 수첩을 크게 관통하고 있던 맥락? 주제는 <집중>이었다.
연애하느라 일에 집중 못하고,
훈계, 잔소리 듣기 싫어 관계에 집중 못하고,
미래 걱정하느라 현재에 집중 못하고,
지난 날만 그리워하느라 현재에 집중 못하고
그래서 붕붕 떠 있기만 했던 시절이라 계속 나에 대해, 현재에 대해, 지금 내 일에 대해 집중할 채찍이 필요했고 그 수첩이 나름 채찍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수첩은 지금 보면 치부책이나 마찬가지이다.
맨날 쓰던 단골 멘트가
"야! 집중해. 지금 회의하잖아!"
"집중해! 내일 걱정 그만하고 지금이나 잘해"
"오늘을 살자"
가끔은 극단적으로
"나는 내일 죽는다" 이 문장을 썼다.
그렇게 수련 아닌 수련을 하다 보니 지금은 꽤~ 과거를 많이 그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미래 계획은 드럽게 많이 세운다.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아 늘 미래를 상상한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꽤 많이 내 발은 현재에 걸쳐 있다.
그렇게 나는 과거, 현재, 미래에 예민한 편이었기 때문에 인생을 길게 산 한 노인의 그 멘트가 너무 가슴을 때렸다.
무엇보다 이 말... '눈이 부시게'
오늘 그랬다.
눈이 부시게 날이 좋았고, 눈이 부시게 딸아이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눈이 참 부신 그 순간 너무나 절실하게 '오늘을 살고' 싶어 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고, 내가 만난 오늘이 너무 행복해 벅차올랐던 것이다.
결국 행복해서 눈물이 날 뻔한 것이다.
내 존재 자체와 내 존재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지금.
딸을 볼 수 있고
딸이 나에게 안기고
집에 갈 수 있는 차가 있고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있고
지금의 행복을 전할 수 있는 가족이 있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고
미세먼지 없는 하늘이 있고
잔디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개들이 뛰어놀고
아름다웠다.
행복했다.
그렇게 가슴 벅찬 에너지를 듬뿍 충전하고 나니 집에 와서 그 지겨운 그림 그리기 놀이... 1~10까지 무한반복 써주기가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