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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Oct 09. 2022

2단계. 시를 좀 더 재미있게 만나기

- <4단계 방법으로 시랑 친해져 보는 건 어때요> 중에서 -

   여전히 시에 납치당하고 싶지 않은가. 아직도 시는 지루하고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비슷한 샛길로 빠져보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유시인 오르페우스가 환생한 것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노래를 들어보라.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분명 시인인데 시에 음을 입히고 노래를 부른다. 심지어 악기까지 잘 다룬다. 누가 그들을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시를 기막힌 선율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축복까지 누리게 되었다.  

            

  시작은 나훈아였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 영원히 영원히 내가 사는 날까지 /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회초리 치고 돌아 앉아 우시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영영>과 <홍시>의 가사 일부다. 굳이 그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가사 자체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냥 시다. 아주 훌륭한 시.  

    

  <영영>은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비견될 만큼 아름답다. <홍시>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 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운율을 어쩌란 말인가.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가 떠올랐다. 또 눈물이 났다. 나의 엄마와 엄마가 된 나를 여자 사람으로서 동시에 위로해 주는 시다. 몇 년 안에 표를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나훈아 디너쇼에 꼭 부모님을 모시고 가서 함께 이 미친 예술가를 영접하고 싶다.  

   

  김창완은 언제 봐도 감성 충만한 어린 왕자 같다. 그래서인지 늙지도 않는다.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 나에게 커다란 의미 /......//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되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너의 의미>와 <안녕>의 가사 일부다. 감수성이 충만한 아이가 느껴지지 않는가. 사랑 없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속 제제처럼. 최근에 그는 「무지개가 뀐 방이봉방방」이라는 동시집도 냈다. 세상에나, 그 기발하고 영민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어쩔 건가. “너 용서가 뭔지 아니? / 용서가 한 번 봐주는 거 아니에요?” <용서>라는 동시의 마지막 시 구절이다. 무릎을 쳤다. 캬!.   


  이적은 엄청난 다독가답게 구사하는 어휘가 섬세하고 다채롭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이제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나에겐 마르지 않는 눈물을 남겼네”, “오랜 뒤에도 이렇게 간절할 거라곤 / 그땐 둘 중 누구도 정녕 알지 못했죠”, “아직 네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오싹한 낭떠러지도 / 뜨거운 불구덩이도 상관없어요/......// 우리가 우리가 되어간다면 그럼 충분해요”, “그대라는 오랜 매듭이 / 가슴속 깊이 남아서” “어느 곳에 있을까 / 그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게 참 맘처럼 쉽지가 않아서 / 그게 참 말처럼 되지가 않아서” 다 열거하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것 같아서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발췌한 가사들이 어떠한가. 은유가 살아있지 않은가. 어쩌면 저리도 참신한 어휘가 딱 제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는지. 독일의 한 철학자는 “서정시란 자연적인 감정을 리듬과 멜로디 같은 예술적 손질을 통해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 철학자의 말대로라면 그의 노래는 서정시고, 그는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아름다운 시구절로 숭고하게 다듬어 놓았으니까. 만약에 그를 만난다면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걸.  


   아! 에픽하이의 타블로, 그는 영원해야 한다. 그는 그림책 속에서 갓 튀어나온 시인이다. 바로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라는 그림책 속 주인공 프레드릭처럼. 이 위대한 시인은 어디에서든 겨울을 위해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고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그의 노트는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한다. 그의 노랫말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어 탄생했는지 보고 싶은 이들이 많을 테니. 나는 그를 통해 힙합에 대한 편견을 깼다. 그전까지만 해도 힙합은 욕설이나 비속어가 난무하는 듣기 거북한 길거리 문화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힙합이 시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다는 것을. 한 편의 서사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 여기 Beat 위에 Rhyme의 설계사가 나가신다. 이제 겸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노랫말을 영접해보자. 비가 오면 <우산>은 무조건 들어보길 권한다. “텅 빈 방엔 시계 소리 / 지붕과 입 맞추는 비의 소리 / 오랜만에 입은 coat 주머니 속 반지 / 손 틈새 스며드는 memory" ‘이’로 끝나는 라임이 꼭 빗물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번에는 <고마운 숨>을 들어보자. "나를 숨 쉬게 하는 건 잔잔한 비, 친구와의 달콤한 시간낭비, 붉은 꽃, 푸른 꽃, 새벽의 구름 꽃, 사랑이란 정원에 흐드러지는 웃음꽃. Bloom. 내 맘의 휴식. 제주도의 바람. 서울 밤의 불빛. 거릴 걷다 보면 들려오는 에픽하이의 music. 내 아내와 아이의 눈빛”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때 들으면 좋다. 일상의 작은 것들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 노랫말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비쳤다면 과한 찬양일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구심이 들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연필 깎기>와 <낙화>를 들어보자. “시작을 잊지 마 / 이 길이 쉽지 않은 걸 그댄 알고 있었잖아, 땀을 씻지 마 / 그대의 밤이 틈을 잃어버린 삶이 / 사람들의 태양이 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 “가질 수 없는 꿈이지만 I have a dream / 비틀거리는 꿈이지만 I have a dream / 버림받은 꿈이지만 I have a dream / live and die for this dream"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을 계속 상기시킬 수 있었다.  <빈차>는 삶의 무게에 눌려 지친 마음을 가만히 위로해 주고 우리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내가 해야 할 일 / 벌어야 할 돈 말고 뭐가 있었는데 / 내가 가야 할 일 / 나에게도 꿈같은 게 뭐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관련된 그 어떤 시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 <당신의 조각들>도 꼭 들어보길 바란다. “당신의 눈동자, 내 생의 첫 거울 / 그 속에 맑았던 내 모습 다시 닮아주고파 / 당신의 두 손, 내 생의 첫 저울 / 세상이 준 거짓과 진실의 무게를 재 주곤 했던 내 삶의 지구본” 아버지와 관련된 노랫말은 항상 눈물을 동반한다. 하지만 눈물은 그에게 가는 지름길이 되어 준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았는가? 이제 끝장을 보자. 힙합과 트로트의 융합! 그 어려운 걸 타블로가 해냈다. 요즘 대한민국은 트로트 신드롬에 빠져있다. 그런데 그는 10년 전에 이미 트롯의 대세를 예언했다. 보라. 이 놀라운 lyrics를. 알만한 트로트 노래 제목들을 퍼즐처럼 절묘하게 끼워 맞춰놓았다.           

  “아무리 각 잡아 봐도 똑바로 봐도 / 술 취하면 똑같아 뱃속에 파도 / 일렁일 때마다 되려 술잔을 찾고 / 팔다리는 나풀대 마이크를 잡고 / 딴따라 딴딴따 트로트 가락에 / 맞춰서 움직여 네 박자 / 땡뻘 같은 하루에 유일한 동반자 / 술 깨면 떠나 사랑은 나비인가 봐 /.......// 힙합 댄스 락 발라드도 좋지만 슬플 땐 what? / 힙합 댄스 락 발라드도 좋지만 슬플 땐 트로트!”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지 않은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 힙합 트롯을. 톨스토이는 위대한 예술은 누구나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용이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타블로의 힙합은 분명 위대한 예술이다. 오래전 라디오 모 프로그램에서 타블로가 게스트로 출연하여 영어를 가르쳐주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배고프다’를 “I'm hungry"가 아닌 다른 예쁜 표현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뭐라고 답했을 것 같은가. 참고로 그는 시인이다. 바로 ”My stomach is crying"이었다. 별게 아닌데 시적이지 않은가. 우리도 따라 해 보자. 의인법이 뭐 별건가. 뭐든 좀 짠하게 보면 돼지.


   마지막으로 그가 19살 때 쓴 'One lesson'도 꼭 들어보길 바란다. 내용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여러 모순에 던진 철학적 질문들이다. “Genius is not the answer to all questions. It's the question to all answers." 이 문장이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천재성(특별한 재능)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모든 답에 대한 질문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까. 우리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에서 당연함을 걷어내고 호기심을 입은 질문을 던져보자. 혹시 누가 아는가. 나만의 라임으로 랩을 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질지. 아니 우선 하상욱 시인 따라 쟁이라도 될 수 있을지.  

        

  아무튼 나는 소망한다. 언젠가 타블로가 칠레의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을 능가하는 시집을 내기를. 더 기발하고 촌철살인적인 질문들로 가득한. 현재 마음이 괴로운가? 아니면 외롭거나 쓸쓸한가? 그것도 아니면 삶이 평범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타블로의 머리가 아닌 몸에서 꺼낸 말들을 읽고 들어 보아라. 힙합 명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을 테니.  

       



  가끔은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의 노래도 들어보라, 이 젊은 음유시인들의 노랫말은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중년의 나에게도 공명을 일으킨다. 혁오밴드의 <톰보이>나 <위잉위잉>, <Hey Sun>을 듣다 보니 조금은 보인다.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불만, 희미한 희망까지.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만 가는.”, “집에서 뒹굴뒹굴 할 일 없어 빈둥대는 / 내 모습 너무 초라해서 정말 죄송하죠” 나는 이렇게 말하는 그들의 속이 오죽할까 해서 마음이 아팠다. 흔들리지만 견고한 문장이 20대의 불안한 나를 소환했다.    

       

   나 역시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며 백수가 된 적이 있었다. 집에서 쉬어도 쉬는 게 아니고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도 죄송하게만 느껴지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Hey Sun>에 나온 노랫말 “the end is here another beginning of the end"처럼 끝은 여기서 끝의 또 다른 시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문을 두드렸다. 금수저도 은 젓가락도 없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냈다. 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부끄러움이든 분노든 거기에서 동력을 얻어 도전하길 바란다. 아니 그럴 거라 믿는다. 그러니 너무 오래 비틀거리지 않기를. 너무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끝으로 딘의 <인스타그램>은 싸이월드를 하던 시절의 다크서클 가득한 나를 불러냈다. 당신은 예전에 싸이월드를 열심히 했던 부류인가? 나는 하마터면 열심히 할 뻔했다가 발을 뺐었다. 어느 가을, 밤새도록 내 아이의 사진을 올리고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싸이월드를 구경하느라 날을 꼬박 새웠던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문득 든 생각이 내가 노출증 혹은 관음증 환자인가라는 거였다. 왜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삶을 몰래(?) 들여다보고 나서 마음이 헛헛하고 기분이 나빠지는지. 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어이 이 새벽에 디지털 세상 속에 내 포장된 삶을 띄워놓는지. 내게 묻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비교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웃고 있는 사진 속 핑크빛 위선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싸이월드를 떠났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나보다 거의 20년은 젊은 한 청년이 새로운 소셜 미디어인 인스타그램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닌가. “잘난 사람 많고 많지 / 누군 어디를 놀러 갔다지 / 좋아요는 안 눌렀어 / 나만 이런 것 같아서 /......// 부질없이 / 올려놓은 사진 / 뒤에 가려진 내 마음을 / 아는 이 없네 / 난 또 헤매네 / 저 인스타그램 속에서” 그 마음속이 얼마나 복닥거릴지 알기에 대신 가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자아와 내면아이를 데리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디지털 자아’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얼마나 심리적 부담이 클까. 『테크 심리학』을 보면 신화 속 나르시시는 오로지 자신의 모습에만 빠져들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밑 빠진 앱이라 불리는 소셜 미디어을 사용하면서 훨씬 사교적인 자아도취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즉 현대인에게 자기자랑은 타인과 연결되어야 하는 필요에서 나온 공동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가 억지로 사교성을 띤 꼬리를 흔들며 그 위험한 바다에서 부유해야 하는가. 독의 유무가 확인도 안 된 인정과 칭찬을 받아먹으면서.

           

  우리 모두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에 속해있다고 한다. 원래부터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내 맘에는 구멍이 있어 / 그건 뭘 로도 못 채우는 것, yeah / 난 지금 가라앉는 중인걸 / 네모난 바닷속에서” 마음속 구멍은 타인과의 연결로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자아도취에 빠져 마르쿠스 피스터의 그림책 속 무지개 물고기처럼 자신의 반짝이 비늘을 기쁘게 나눠줄 수 있다.

         

  모처럼 젊은 음유시인들 덕분에 과거를 떠올려 보고 ‘그땐 그랬지’라고 추억할 수 있어서 좋았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이란 쾌락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킴으로써 함께 동일한 감정을 결합시키고, 인생 및 개인을 온 인류의 행복으로 이끄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세대 간의 감정을 결합시키고 소소한 행복을 견인하는 작고 위대한 예술이라 하겠다.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지 않은가. 노랫말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유재하’, ‘김광석’, ' 신해철', '심수봉'은 이미 왕좌에 앉아계시므로 감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밖에 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루시드 폴의 <오, 사랑>, <평범한 사람>,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등 휘파람 같은 편안한 노래, 스텔라 장의 <Villian>,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도 꼭 노랫말을 곱씹으면서 들어야 한다. 시인은 현재 이 자리에 없는 것을 언어로써 불러내는 자라고 했다. 이 주술사들이 내리는 말의 비를 흠뻑 맞아보자. 혹시 아는가. 우리도 운 좋게 그들의 마법에 걸려 작은 고래 한 마리라도 불러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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