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단계 방법으로 시랑 친해져 보는 건 어때요> 중에서-
자, 이제 마음에 드는 시인도 찾았고, 샛길에서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렸지만 살아남았으니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시집 사냥에 나서자. 시집을 집에 들이는 일은 꽤나 신중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알 것이다. 그 옛날 라면 냄비 받침대로 사용해서 시인의 얼굴에 화상을 입힌 죄. 두툼한 책들 속에 끼워둬 짜부라지게 만들고 시인의 존재감을 지운 죄. 더 이상 그런 우는 범하지 말자.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구제하는 게 문학이요, 모든 미친 것들에게, 미치지 않으면 안 될 사연 하나씩 찾아주는 게 시다. 그런 착한 일을 하는 시를 홀대하면 되겠는가.
우선 읽기 편한 시집부터 읽자. 그래야 한 동안 내 손에 머무르며 시인과 함께 호흡할 수 있을 테니. 아무리 유명한 시인의 시집이라도 알아듣기 어렵고, 공감되는 부분이 적다면 아직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 시의 세계로 떠나려고 하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잠시나마 시에 기대어 위로받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시의 문장들을 곱씹어 말랑말랑한 풍선껌으로 만들어서 헐벗고 구멍 난 마음을 메꾸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풍선껌도 더러워지고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고 만다. 다시 시집을 펼쳐 곱씹을만한 시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집은 내 시야와 손길이 쉽게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사서 보자는 얘기다. 나는 현재는 독서를 위해 도서관과 알라딘 중고서적을 주로 이용하는 편이지만 시집만큼은 꼭 서점에서 직접 보고 구입한다. 아마도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 때문이리라.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 국밥이 한 그릇인데 /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든 공’이 얼마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나조차도 흉내만 내본 정도이니까. 황현산 선생님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작업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 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소명 의식을 가지고 시를 쓰는지 이제 알았는가. 시집의 무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인 것이다. 시인이 밤마다 제 몸을 상해가며 쓴 시는 밤마다 상한 마음을 붙들고 우는 이들에게 위로 한 그릇, 용기 한 사발이 된다. 그래서 나는 비싼 아메리카노 두 잔 값밖에 안 되는 만원을 기꺼이 지불한다.
그런데 책에도 시절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때 내 마음이 무엇을 끌어당기는가에 따라 집에 데리고 오는 시집의 종류가 다르다. 어른의 지혜와 통찰이 필요할 때는 잠언시집을, 지적 허영을 채우고 싶을 때는 노벨 문학상 시인의 시선집이나 그해 신춘문예 당선시집을, 복잡한 마음을 비워내고 싶을 때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산문집을, 비슷한 연배의 중년 아줌마와 시적인 생활 수다를 떨고 싶을 때는 성미정 시인의 시집을, 요즘 세대들의 삶과 기발한 사유가 궁금할 때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그리고 맑은 영혼들의 빛나는 호기심이 그리울 때는 동시집을 데려왔다.
류시화의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고전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달리 읽힌다. 30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잠언시가 무거운 훈계 말씀처럼만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경험에서 얻은 지혜와 성장의 순간이 거기에 녹아있다. 시의 문장들은 가볍게 춤을 추며 내 안으로 들어온다. 가령 루티야드 키플링의 시 <만일> 속 “그리고 만일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간을 /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60초로 대신할 수 있다면, / 그렇다면 세상은 너의 것이며 / 너는 비로소 /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제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한 날들이 어디에 있을까. 한없이 허수아비나 겁쟁이 사자로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 펼치면 지혜와 용기를 주는 마법 같은 시집이다.
한 번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혹은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숭배 대상이 된 시인’이라는 사람이 쓴 시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데리고 온 시집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과 찰스 부코스키의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이다. 제목에서 글들의 품성이 느껴지지 않은가. 그러나 이 대단한 사람들은 결코 잘난 체를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고상하게 글말로 풀어썼고, 한 사람은 걸쭉하게 입말로 풀어썼다는 차이일 뿐이다. 결국은 거짓 없이 진실 되게 현재를 살아내라고 이야기한다. 아직 한참 모자란 내게는 그만큼 들렸다.
어쨌든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시를 보고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하고,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하고,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하는’ 그녀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송구스럽지만 잠깐이나마 같은 부류로 느껴졌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택한’ 그녀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양파처럼 겉과 속이 일치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되었으니까.
아! 찰스 부코스키! 가식이라는 기름을 쫙 빼버린 니체 같으니라고. 지금이라도 그를 알게 돼서 얼마나 감사한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분노 뒤에 숨은 슬픔이 느껴져서 자꾸 눈물이 난다. 아마도 그의 아픈 유년시절을 알기에 더욱 울림이 큰 것 같다. <불씨>라는 시에서 그가 뱉은 말은 위로와 용기를 넘어 성장에 ‘불씨’가 되었다. “많이도 필요 없어, 그냥 불씨만 살려 둬. / 불씨 하나가 / 숲 전체를 태울 수 있어. / 그냥 불씨 하나만. / 그걸 살려 둬. // 해낸 것 같다. / 다행이도. / 참 우라지게 복도 / 많지.” 이 욕쟁이 거리의 철학자 시인의 거역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보라. 세상을 향해 욕을 날리고 싶을 때 보면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해질 것이다.
종교와 무관하게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은 필수품이다. 정화수이자 성수이고 청아하고 품격이 높은 국화차이다. 수녀님의 시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고요한 성당 안에 앉아 있다. 부글부글 끓던 화도 방울방울 거품이 되어 날아간다. 「그 사랑 놓치지 마라」 속 <바다를 꺼내 끌어안으며>를 읽다가는 나도 모르게 “네 그렇게 할게요.”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밀물이 들어오며 하는 말 / 감당 못할 열정으로 / 삶을 끌어안아보십시오 / 썰물이 나가면서 하는 말 / 놓아버릴 욕심들을 / 미루지 말고 버리십시오”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큰 바다를 번쩍 들고 오실’만큼 큰 사랑을 품으신 수녀님! 그 마음을 눈곱만큼이라도 닮고 싶다.
“늘어진 트레이닝복 차림 / 에 맨 얼굴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 / 를 들고 광화문 일대를 걸어다니는” 아줌마풍 시인과 배꼽 잡고 울고 웃으며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성미정 시인의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를 읽기를 권한다. 행색은 저래도 ‘새벽 두 시까지 한 땀 한 땀 오른손 셋째 손가락에 땀나도록’ 시 쓰기에 매달리는 영락없는 시인이다. 나는 이 중년 아줌마 시인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소박해진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처럼 거기에 하얀 털이 났다고 대놓고 호들갑을 떠는 이 시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 근래에 들어 읽기 시작한 시집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와 「뼈」이다. 싱그러운 울울함을 풍기는 젊은 여성 시인들의 자기 고백적 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원하 시인은 하늘, 돌, 바람, 나비, 바다, 꽃 등 제주의 자연을 통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하듯 풀어낸다. 꼭 빨간 머리 앤이 시인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 읽다 보면 그녀의 귀여운 상상력에 빠져들어 계속 읽게 된다. 왠지 술은 셀 것 같다. 문창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시집을 딱 한 권밖에 읽어본 적도 없는 이가 이런 흡인력 있는 시를 썼단다. 시는 시인을 알아보나 보다. 대부분 유명한 시인들을 보면 어느 날 문득 시가 내게로 왔다고 얘기하지 않던가.
「뼈」는 이르사 데일리워드라는 흑인 여성의 시집이다. 비열한 남자 어른들에게 성적으로 짓밟힌 이야기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절박하게 풀어놓았다. 아니 피멍이 든 몸과 뼈에서 뽑아내었다. “아름다움은 또다른 형태의 감옥이다”와 “그곳에서는 / 아무것도 너를 찌르지 않는다. / 그 무엇도.”라는 <또 화요일>에 나오는 시 구절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약자의 위치에 있었을 때의 여성의 몸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웬만하면 나는 읽히는 시집을 읽는다. 물론 다른 시인들의 시집도 가지고 있지만 초현실주의 시법의 현대시는 여전히 어렵다. 아무래도 내가 가진 배경지식이 미천하여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가끔 도전한다. 황현산 선생님은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상상해냄으로써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려 한다.”라며 이해하기 어려운 시에 대해 친절하게 해설했다. 그 말씀을 믿고 꾹 참고 읽어본다. 읽다가 바로 덮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시는 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쓰고, 독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는 문학이라고 했다. 머리에 쥐가 나게 하는 시 말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시를 읽자. 어려운 시도 마음이 편한 쪽으로 해석하자. 우리는 날카로운 평론가가 아니라 더 순해지고 싶은 순한 독자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구입한 시집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시집을 사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필요할 듯한 시를 골라 귀퉁이를 접어 선물해보자. 시 찜질은 누구에게나 필요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