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강차 Oct 18. 2022

4단계. 시처럼 생긴 것 긁적거리기

-<4단계 방법으로 시랑 친해져 보는 건 어때요> 중에서-

  이제 시와 친해지는 방법에 대한 긴 여정의 종착역에 거의 다 왔다. 지금쯤 당신만이 지니고 있는 그 생각과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일 채비가 다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섬세한 관찰력을 지닌 뇌, 연민의 마음을 지닌 심장, 시처럼 생긴 것을 쓸 용기까지 다 준비되었다. 드디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마법만 부리면 되는 것이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시처럼 살라고 했던가. 나는 이 말이 더 어렵다. 도대체 시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오덕 선생님은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라는 책에서 우리 아이들이 시를 만드는 장인바치가 아니라 시를 생활에서 찾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찾았다! 시처럼 살라는 말의 의미를. 시를 생활에서 찾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시생인이라 부른다. 내가 지은 말인데 ‘시처럼 생긴 것을 긁적이는 사람’의 줄임말이다. 몸을 상해가면서 시를 쓸 자신도 없고, 시인처럼 고뇌와 기쁨들을 보는 천 개의 눈을 가지지도 못했으니 그냥 비슷한 것을 쓰는 사람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오덕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과도 의미가 통한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마음에서 일렁이는 목소리를 담을 그릇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그 해답은 미국 시인인 메리 올리버가 30년 넘게 늘 뒷주머니에 넣고 다닌 공책에서 찾아보자. 그녀의 산문집 「긴 호흡」을 보면 후에 시로 재탄생할 언어의 알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고 들은 것, 생각들, 책에서 인용한 문구, 일상의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 예를 들어, “흰뺨오리들은 아직 그레이트 연못에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많은 글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였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 “당밀, 오렌지 하나, 회향 씨, 아니스 씨, 호밀 가루, 이스트 두 덩어리” 등등. 이렇게 어떠한 형식 없이 순간순간을 포착해서 기록해두면 된다.  

    

  그런데 엄마는 바쁘다. 우리는 메리 올리버처럼 아침마다 바닷가 근처를 산책하며 늑대거북의 움직임과 흉내지빠귀의 노랫소리를 관찰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 시인들처럼 단지 시를 쓰기 위해 제주도나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여기저기서 ‘엄마’, ‘여보’하며 나를 찾는 식구들의 소리에 고독의 시간을 내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하긴 이르다. 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에서 언급된 융의 부인이자 여성분석가인 엠마 융은 이렇게 말하여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여성의 창조성은 생활의 영역에서 표현된다.” 우리의 주 활동 무대는 가정이다. 이 생활 공동체가 창조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인 것이다. 가족을 위한 모든 생활이 시로 올 수 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빨래를 개다가, 아이를 교육시키다가, 장을 보다가. 

    

  나도 순간들을 잘 메모해 두는 편이다. 한 번은 프라이팬에 김을 굽고 있는데 한 템포 늦게 뒤집어서 김 한 장이 살짝 탔다. 그런데 그 순간 김이 화상을 입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얼른 나의 사물응시독후감 노트에 ‘김, 그녀의 몸이 화상을 입었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날 밤, 이 한 문장이 단초가 되어 <구운 김>이라는 시처럼 생긴 것이 탄생했다. 뒷부분만 들어보자. “그런데 너무 뜨거웠나 보다 / 예민한 그녀의 몸이 화상을 입었다 //.....//드디어 드러나는 오묘한 검푸른 빛 / 단단하고 바삭한 결 / 나는 경건하게 가위질을 했다 / 그녀의 슬픔이 우수수 떨어졌다 // 오목한 쇠 요람에 갓 태어난 미끄덩미끄덩한 밥알을 /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막 눈물을 닦아낸 보송보송한 / 검푸른 이불을 덮어주었다 / 그제야 하얗게 피어오르던 울음이 뚝 그쳤다” 어떤가. 시까지는 아니어도 시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이성복 시인의 말대로 버림받은 것, 평범한 것을 귀하게 여기니 소박한 생활의 시 한 편을 낚을 수 있었다. 이때 즐거운 몰입을 통해 얻은 희열은 덤이다. 최근에는 키우던 강낭콩의 꼬투리가 통통하게 올라오고 잎이 시들해지는 모습을 보고 순간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났던 적이 있다. 신호다. 몸에서 강낭콩에 대한 시가 뚫고 나올 거라는. ‘새끼를 낳고 자신의 몸에서 진액을 뽑아내 키우느라 늙어가는 일은 강낭콩도 마찬가지다’ 이 한 문장을 노트에 적어놓았다.  언젠가 투박하고 못생기더라도 시처럼 생긴 것이 얼굴을 내밀 거라 기대하면서.     

  이거다. 시가 별게 아니다. 나태주 시인은 「꿈꾸는 시인」에서 시인은 곡비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곡비란 옛날 상갓집에서 주인을 대신해서 울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 번쯤은 어떤 사물과 한 몸이 되어 교감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의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마라. 시처럼 생긴 것이 탄생하려는 징조다. 시생인이 될 절호의 찬스인 것이다.  

  

  만약에 순간은 잘 메모해 두었는데 그다음 문장을 잇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시인들의 시 창작 강의를 들어보자.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는 아포리즘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읽기 편하다. 시에 대한 엑기스만 모아놓은 개론서라 보면 될 것이다. 매일 냉동실에서 꺼내 먹고 싶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같다. 나태주 시인은 「꿈꾸는 시인」에서 시인 지망생에게 아주 쉽고 다정하게 시를 쓰는 법을 알려준다. 시를 쓰기 전, 쓸 때, 쓴 후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친절하고 꼼꼼하게 짚어준다. 장석주 시인은 「은유의 힘」에서 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은유를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40년의 연륜을 바탕으로 자세히 알려준다. 책을 덮고 나면 은유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주관하여 줌으로 하는 온라인 강의도 있다. 힘들게 문화센터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시 쓰기를 편하게 배울 수 있다니. 참 좋은 세상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우리는 대체 이 밥도 안 나오고 돈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일을 왜 하려는 걸까? 나는 시라는 것을 읽는 행위, 그리고 쓰는 행위를 ‘살아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숨’을 느끼기 위한 작은 발버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숨 쉬지 않고 살아있지 않다면 그 아름다운 것들을 어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짧은 글로 풀어쓰는 동안 잊고 있던 숨도 지금 살아있음도 모두 느끼게 될 것이다.   

      

  시는 자기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성미정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엄마가 감정 조절을 못하면 자녀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기 마련인데 본인은 시로 풀었기에 아들을 많이 혼내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아이에게 화를 낼 것 같으면 시를 읽었다. 밤에 나의 감정을 꺼내어 시처럼 생긴 것을 쓰다 보면 낮에 왜 아이에게 야단을 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화가 나고 울컥할 때 시만 한 것이 없다. 시는 우리 안에 사는 괴물을 순한 양으로 만들어주는 심신 안정제이다.    

  

  나는 안다. 시를 읽고 쓰고 향유한다고 해서 마침내 내면의 소리에 모두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걸. 하지만 시는 분명 소화되지 못한 감정들의 배설을 돕는다, 종이 위에 쏟아내고 다듬다 보면 건강하지 못한 감정이 엉뚱한 곳으로 튀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러니 일단 쓰자. 그것이 타인을 공격하기 전에, 심지어 방향을 틀어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기 전에, 자신을 배신하기 전에. 참고로 고상하게 말고 그냥 아줌마풍으로 쓰자. 감자 껍질을 벗기는 단순한 작업도 의식을 가진 행위라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은가. 의식을 가지고 집안일을 해보자. 고무장갑을 벗는 순간 좋은 시까지는 아니어도 뭐라도 적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3단계. 마음에 드는 시인의 시집 사서 읽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