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신_9. 선과 악

우리는 왜 옳고 그름을 필요로 했나

by 알수없음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것보다 편한 게 있을까.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이 구분은 먼 옛날,

인간이 타인과 나를 구분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계속되어 왔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었고,

집단에서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일종의 경계가 필요했다.


인간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이

내게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일을 타인에게 가하면 죄라 부르고 마땅히 처벌하기로 약속했다.

약속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집단이 거대화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부터

이 약속은 조금씩 더 세분화되고 복잡해져갔다.

그럼에도 약속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약속을 하는 것이 나았다.

집단은 빠른 판단과 통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매번 상황을 분석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조건을 비교하고,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선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인내와 같은 에너지들 말이다.


집단의 유지를 위해선

선과 악, 허용되는 것과 금지되는 것, 보상과 처벌을 일괄적으로 묶어내고

명령과 복종을 습관화하게끔 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이 방식이 효과를 본 이유는 행동을 통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책임을 개인에게 귀속시켰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동체는 구조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이건 선한 선택이었는가, 악한 선택이었는가'

'기존에 허용하던 것이었는가, 금지한 것이었는가' 만 물으면 되었다.

조건과 배치, 맥락은 사라지고 개인의 도덕성만 남았다.

문제있는 개인을 배척하기만 하면, 남은 구성원은 안전하고 평화롭다는 착각 속에 살 수 있었다.

아이들은 '모르면 외우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배척받지는 않을 것' 이라는 믿음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을 잊게 되었다.


문제는 이 단순한 구분이 사실은

집단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1) 범죄 발생률은 특정한 개인의 성격이나 도덕성보다

환경, 교육 접근성, 사회적 고립, 생존 압박과 연결된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자를 악한 개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익숙하다.

악으로 규정된 개인은 공동체로 복귀할 경로를 잃고, 고정된 정체성으로 살아가기 쉽다.

고정된 정체성은 개인의 환경, 교육 접근성,

사회적 고립, 생존 압박의 문제를 야기하고 재발률을 높인다.


2) 알코올, 마약, 도박 중독 등은 오랫동안 '의지의 실패', '나쁜 선택'으로 설명되었다.

따라서 중독은 치료 대상이 아닌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현대 의학과 심리학은 중독을 뇌 보상 회로, 스트레스 반응, 환경적 결핍의 결과로 설명한다.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의 단순 구분은 중독자의 고통을 줄이지 못할 뿐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 회복의 경로를 차단한다.


3) 선악 논리는 노력 신화와 결합될 때 성공을 도덕적 보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성공은 선한 결과가 되고, 실패는 잘못된 선택의 대가가 된다.

그러나 결과는 조건의 배열에서 최소 저항값으로 흐른다.

이 구조를 무시한 채 성공과 실패를 선악으로 재단하면,
실패는 교정 대상이 아니라 낙인이 된다.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개인을 분류하는 데 그친다.

실패한 자의 고통과 책임은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4) 전쟁은 언제나 선과 악의 언어로 포장된다.

'우리는 정의롭고 상대는 악하다'는 구분은

집단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폭력을 제한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반대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들은 마땅히 고통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민간인 피해, 과잉 폭력, 보복의 악순환은 쉽게 정당화된다.

'선과 악' 프레임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지속시키는 연료가 된다.


이처럼 선악의 구분은 행동을 빠르게 판단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문제를 이해하고 수정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질문을 제거하고, 원인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며, 구조적 조정을 지연시킬 뿐이다.


선과 악은 질서의 언어였을 뿐, 진실의 언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해체하면 어떻게 될까.


무질서해질까? 혼란해질까?

누군가는 타인을 착취하고,

개인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우위를 점하며,

강력범죄가 발생하고,

국가들은 당장이라도 전쟁 태세에 돌입할까?


아마 선과 악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건, 조건, 결과, 영향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질문은 이렇게 바뀔 것이다.


이 사람의 행동은 어떤 조건에서 발생했는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가.

이것이 최소 저항값으로 판단된 이유는 무엇인가.

결과는 개인과 집단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이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가.


비난도 없고, 찬양도 없다.

오직 관찰과 조정만이 남는다.

인간은 작동과 실패, 유효와 무효로 세계를 읽기 시작한다.

타인을 심문하는 재판관 대신, 구조를 설계하는 참여자가 된다.


선악은 자기 인식의 확장을 위해 신이 부여한 절대 규칙이 아니다.

망각 이후의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빠르게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임시 도구다.

그리고 반복이 충분히 축적된 지금,

단순한 분류는 더 이상 새로운 인식을 만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선악의 개념을 내려놓기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한 번도 고통을 무엇으로 읽어야 하는지 배운 적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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