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노력하면 가치있는 삶에 도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배워왔다.
노력하면 된다.
노력하면 나아진다.
노력하면 의미 있는 삶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사회가 개인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 설명이다.
정상에서 벗어났을 때,
뒤처졌다고 느낄 때,
원하는 결과에 닿지 못했을 때,
사회는 묻지 않는다.
왜 조건이 이렇게 배치되었는지,
왜 다른 경로가 열리지 않았는지.
대신 묻는다.
너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이 순간 노력은 수단이 아니라 의미가 된다.
노력 신화가 강력한 이유는
노력을 통해 결과를 바꿀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삶의 가치를 설명하는 데 최적화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노력했다면 의미가 있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어느새 노력은 삶을 이끄는 힘이 아니라 결과를 평가하기 위한 언어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선택도, 의지도 없다.
기질은 태어날 때 정해진다.
환경도 주어진다.
사건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발생하고,
인간은 주어진 가능성 중에서 가장 마찰이 적은 경로로 흐른다.
이 구조 안에서 개인의 노력은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미 열린 결과 위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게 하는 에너지가 될 뿐이다.
이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노력으로 가치 있는 삶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으로 정의되어 왔는가다.
사회가 말하는 ‘의미 있는 삶’은 대체로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넓은 영향력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회가 효율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방향과 동일하다.
각자의 성과를 수치로 환산하기 쉽고,
비교가 가능하며,
위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향.
여기서 노력은 좌표에 도달하기 위한 정당화 장치로 작동한다.
사회가 유지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숨긴 채, 구성원의 동력을 얻는 방법이 된다.
따라서 노력 신화는 성공한 사람에게도, 실패한 사람에게도
그리고 사회에게도 모두 유용하다.
성공한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는 설명이 되고,
실패한 사람에게 자기 비난을 지속시키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누군가는 분개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냐고.
평생 아무것도 노력하지 말라는 거냐고.
생각해보자.
만약 노력이 의미와 목표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인류는 '가치'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려야 할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더 나은 것'과 '덜 나은 것', '의미있는 것'과 '의미없는 것'을
모두 새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노력 여부와 관계없이 주어진 조건값으로서,
마찰이 가장 적은 흐름으로서의 상태를 가치 판단 없이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력은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탐색을 계속하기 위한 에너지로 남을 것이다.
의미는 쫓아야 할 목표가 아니라,
관찰이 누적된 뒤 자연스럽게 남는 흔적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현재 삶의 모양을 개인의 노력 여부로 설명하는 것이 더 좋은지.
노력과 가치의 의미를 지금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은지.
전자는 부작용이 너무 많고,
후자는 경험한 적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