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신_7. 정상이라는 허울

비정상은 나쁜 것일까

by 알수없음



우리는 너무 쉽게 '정상(正常)'을 목표로 삼아왔다.


정상적인 모양, 정상적인 상태, 정상적인 관계, 정상적인 삶과 같이

정상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남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정상은 무리에서 뒤처지거나 모자라지 않다는 공식 확인이 되고,

개인에게 위안이자 다음을 허락하는 신호가 된다.


하지만 정상은 특정한 시간 또는 특정한 사회 안에서

가장 자주 관찰된 상태, 가장 많이 반복된 행동, 가장 관리하기 쉬운 패턴의 평균값이다.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가 아닌 그 수가 '많고/적음'에 불과하다.


문제는 공동체가 이 평균값을
곧잘 ‘옳은 것’, ‘좋은 것’, ‘바람직한 것’으로 치환한다는 데에 있다.


마땅한 근거도 없이

'안전한 것, 예측 가능한 것, 관리 가능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태인 정상을 선호하고

정상의 틀에서 벗어난 것들에 감점을 매겨왔다.


이 오랜 습관은 급기야

'정상' 이라는 단어를 윤리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비정상' 적인 인물, 상태, 결정, 관계, 모양이 스스로 죄책감을 안고 위축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정말 '비정상'은 문제가 있는 걸까.


'비정상'을 ‘노이즈’라는 용어로 치환해 살펴보자.

노이즈란 기존 규칙으로 해석되지 않는 신호를 말한다.

어떤 구조가 예상한 범위 안에 있으면 정보가 되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노이즈가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노이즈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존 규범으로 설명되지 않는 삶,

기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정체성,
기존 경로로 예측되지 않는 선택.


이런 노이즈는 공동체에 예상치 못한 질문을 안고 온다.

질문은 해답을 요구하고,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상당한 비용을 동반한다.


사회는 지금까지 이해보다 유지를 택했고,

유지를 위한 빠른 분류, 빠른 판단, 빠른 대응을 수행해왔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노이즈를 배척하는 편이 나았다.

이에 공동체는 노이즈를 ‘문제’, ‘위험’이라는 언어로 번역했다.

구조가 붕괴되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다시말해, '비정상'이 배척되는 이유는

그것이 나쁘거나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안정성을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의 목적이 자기 인식의 확장이라면 정상은 목표가 되지 못한다.

정상은 출발선이 된다.


출발선은 기준이 되고,

비정상은 그 기준에서 벗어난 차이를 드러낸 상태 값이 된다.

차이가 드러날 때 관찰이 시작되고, 관찰이 쌓일 때 인식이 확장된다.


신의 자기 인식 구조에서

비정상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확장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인 셈이다.

이렇게 사회가 배척하는 비정상은, 신의 관점에서 가장 가치 있는 데이터가 된다.


정상은 유지를 위한 필요다. 비정상은 확장을 위한 필요다.


따라서 만약 이 사회가 유지 대신 확장 또는 진화를 목표로 한다면,

인간이 신의 자기 확장을 위한 구조이자 일부로서 기능한다면,

여기서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상'이라는 허울에 갇혀있을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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