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 시와 미, 사랑을 되새기며
1989년에 개봉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명작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있어 그 영화를 기억하게 하는 건 화려한 연출도, 비극적인 결말도 아닙니다. 오직 한 문장, 한 목소리가 기억을 넘어 저에게 다가옵니다.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다”
영화 속에서 존 키팅 선생이 제자들에게 이 말을 건넬 때, 그의 눈빛에는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시를 통해 아이들에게 삶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다시 가르치려 했지요.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곧 체제의 불안으로 되돌아옵니다. 엄격한 규율과 완벽한 성적이 인간의 가치를 대신하고, 지배하던 그 학교에서, ‘낭만’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재앙처럼 퍼져나갑니다. 결국 소년 닐의 죽음은 그 낭만이 현실과 부딫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늘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교실, 우리의 사회 속에서 시와 낭만은 어디에 있는가?”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높은 연봉이라는 말들이 삶의 지침처럼 떠돌고, 효율이 미덕으로 포장된 이 시대에, 감정과 사색은 너무나 쉽게 사치이자 과분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삶이란, 그렇게 합리와 경쟁만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글을 통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단순한 회상이나 낭만의 미화가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 감각을 떠올려보고자 합니다.
지금의 사회는 감정에 서툽니다. 우리는 ‘느낌’을 공유하는 대신 ‘논리’를 강조하고, ‘공감’을 이야기하기보다 ‘정답’을 찾으려 합니다. 감정의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대신 빠른 의사소통과 효율적인 표현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효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문장을 쓰고, 불필요한 감정을 품으며,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읽는 존재입니다. 그 모든 비효율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비효율이 낭비로 취급됩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시’라는 단어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낯설어졌는지 깨닫곤 합니다. 학생들은 시보다 코딩 언어를 먼저 배우고, 직장인들은 문장보다 수치를 더 잘 읽습니다. 감정의 언어는 시장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말을 하면서도, 점점 더 서로의 마음을 모르게 됩니다.
시란 본래 ‘사람의 마음을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 느림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느림을 두려워합니다. 멈춰 서면 뒤처진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빠르고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사회가 과연 "인간다운" 사회일까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단어는 참 단순하지만, 동시에 가장 추상적인 단어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정의하려 합니다. 어느순간 미의 가치는 수치로 평가되고, SNS의 ‘좋아요’의 개수로 판단됩니다. 완벽하게 편집된 얼굴, 색감, 풍경만이 아름다움이라 여겨집니다. 과연 그렇게 수치화되고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정말 '아름다움'일까요?
진짜 아름다움은 언제나 결함을 품고 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흘러간 것들을 사랑’했고, 김춘수는 ‘이름 불리지 않은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그들이 노래한 미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사라지고 있기에, 덧없기에, 더욱 눈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회는 완벽을 추구합니다. 학생들은 완벽한 스펙을 위해 밤을 새우고, 기업은 효율적인 인재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완벽함만이 미의 기준이 될 때, 우리 사회는 무감각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다행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 의미가 변화됐을 뿐, 사라지거나 배척되지는 않았으니까요. 이에 반해 ‘낭만’이라는 단어는 이제 거의 사라져버린 단어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 낭만을 말하면, 사람들은 웃으며 “그건 현실을 모르는 소리야.”라고 답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낭만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산다고 말이죠. 낭만이란 비현실을 꿈꾸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꿈꿀 수 있는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낭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모한 선택을 하는 용기이자, 아무 쓸모 없는 것에 시간을 기꺼이 쓰는 여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효율과 생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배워왔습니다. 낭만은 비합리적이고, 감정은 불필요하며, 시간의 낭비는 죄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언제나 그 ‘비합리’였습니다. 예술은 쓸모가 없기에 위대했고, 사랑은 불가능에 도전하였기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발전을 거듭하며 이 단순한 진리를 잊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목적을 가져야 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결국 수단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낭만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삶의 결핍을 메우는 장식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온기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물어야 합니다. 아무 쓸모없는 일에 진심을 담아본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말이죠.
사랑은 제가 말하고자 한 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자 완성입니다.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사랑은 그 감정의 원형입니다. 아름다움이 불완전함의 수용이라면, 사랑은 그 불완전함을 껴안는 행위입니다. 낭만이 무모한 꿈이라면, 사랑은 그 꿈을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사랑을 감정이 아닌 거래의 언어로 다루고 있습니다. ‘조건’, ‘스펙’, ‘경제력’이라는 단어가 사랑의 전제처럼 붙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을 투사한 대상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점점 더 계산적이고, 동시에 더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비이성적인 신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데도 손을 잡고, 설명되지 않는데도 마음이 향하는 일. 그 불합리함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감정,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이 사라지는 사회는 결국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사라지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눈빛을 읽지 않고, 마음의 떨림 대신 데이터의 정확도를 믿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이유 없이, 측정할 수 없이, 그리고 비효율적으로 존재합니다. 그 비효율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계와 우리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사회에서 지켜나갈 마지막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존 키팅 선생이 교실을 떠나는 순간, 학생들이 하나둘씩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그들은 금지된 낭만을 다시 선택합니다. 그들을 책상 위로 올라서게 한 그 한 걸음의 용기가, 바로 시와 미, 낭만, 사랑의 본질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그 교실과 다르지 않다고요. 체제는 언제나 존재하고, 규율은 늘 우리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시를 읽는 마음, 미를 느끼는 눈, 낭만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사랑을 믿는 용기. 이 네 가지는 결코 우리 마음속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다만 지금은 잠시 잊혀져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그 불씨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요.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단지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한 선언입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잊지 않는 한, 삶은 여전히 시적일 것이고, 세계는 언제나 아름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