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승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가라지는 변성기 소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아, 응.”
기억을 떠올리자 안희는 그 자리에 있기가 불편해졌다. 안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고 했다.
“나 먼저 가야겠다.”
“하나도 안 변했네.”양이 말했다.
“뭐가?”
“존심쎄고 못 돼 먹은 거.”
“니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너는 나에 대해 뭘 알아서 그렇게 무시했냐?”
양이 앉은 상태에서 안희를 올려보며 말했다.
“지금 싸우자는 거야?”
그러자, 맥주에 취해 목소리가 달뜬 영자가 둘 사이에 껴들었다.
“워~워~ 다들 기분 좋은 밤에 뭔 지랄들이야? 초등학교 동창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지랄들이야, 지랄”
그러면서 영자는 안희를 다시 잡아 끌어 앉혔다.
“야, 양이가 삼성공고 일짱이야. 친해지면 좋잖아, 연수년도 너 우습게 못 볼 걸!”
그 때 인규가 과자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아이씨, 가게라고는 코딱지만 해서 새우깡에 맛동산밖에 없어.”
안희도 맥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냉장고에서 아빠가 사둔 소주는 몇 번 들이켜 본 적이 있는데 맥주는 처음이었다. 알싸한 소주와는 다른 맛이었고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술이 들어가자, 안희는 자신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다.
“너 말이야, 그때 내가 왜 좋았니?”
안희가 양이를 보며 말했다.
양이도 맥주를 한모금 삼키며 말했다.
“좋아한건가? 그냥 관심이 있었던 건데...그냥 신기한 거 보면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지고 그런 거랑 비슷한거지.”
“뭐?” 안희는 양이의 대답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갔더니 쬐끄한 여자애가 눈을 부라리며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좀 신기하더라고.”
“아~ 그러셔.”
안희는 맥주를 꿀꺽 꿀꺽 들이켰다. 빨리 마시고 일어나야겠다.
“지지 않겠다고 애쓰는 모습이...그걸 뭐라고 말해야하지. 불쌍하다는 아니고...여하튼 뭔가 찡해져 가지고
지켜주고 싶었어.”
안희는 빈 캔을 내려 놓으면서 양이의 말을 되뇌였다.
‘지켜주고 싶었어.’
좋아한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양이가 마지막 학년을 남자아이들의 짖꿎은 장난에서 지켜준 것은 사실이었다.
“고맙네.”
안희는 눈을 땅바닥에 고정한 채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서 영자를 향해 말했다.
“나 진짜 이제 들어가야겠다. 내일 신문 배달 알바도 있고.”
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약간 거나하게 취했다.
“아직 들어가기 시른뎅...”
안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영자를 일으켜 세웠다.
“가자! 우리 먼저 간다!”
남자 아이들은 순순히 그들을 보내 주었다. 민철이 조금 실망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양이가 눈짓하자 두말없이 보내주었다.
영자를 집 앞에 데려다 주고 안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1층 안방 창문이 꺼진 것으로 봐서는 아빠는 먼저 잠든 듯 하다. 엄마는 식당마감 알바를 가서 새벽 3시는 넘어야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안희는 그 때쯤 신문 배급소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잠을 좀 자두어야겠다. 벌써 밤 11시다.
방에 돌아와 눕는데 양이의 말이 달콤하게 다시 들려오는 듯 했다.
‘지켜주고 싶었어.’
좋아하는 마음이든 아니든 안희가 거부한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은근슬쩍 그의 보호가 싫지는 않았다. 그런 자신이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탑방 창문을 열었다. 예전에 맞은 편 집에 살던 대학생이 몇 번 안희의 방을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변태 대학생도 이사를 가고 없다.
창문을 여니 밤바람이 불어온다. 달근하면서도 어딘가 썩은 내가 함께 올라오는 그런 밤이다.
문득 낮에 주워온 <슬픔이여, 안녕>이 생각난다.
책을 찾아 집어들고 방바닥에 누웠다.
첫 장에 쓰인 첫 문장이 안희의 마음 속에 감긴다.
‘나를 줄곤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슬픔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나보다. 갑갑함, 아릿함. 그러한 감정엔 익숙한데...
‘그해 여름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완벽하게 행복했다.’
안희는 문장을 고쳐서 다시 읽어봤다.
‘그해 여름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완벽하게 불행하다.’
그래. 이게 나에게 어울리는 문장이지.
안희는 이런 생각을 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