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난 안희는 후드 주머니 속에 콤파스를 챙겨 넣는다. 이건 호신용이다.
새벽에는 가끔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은 취객들도 있고 안희가 배정받은 동네는 골목이 많아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넣고 다닌다. 만약에라도 망할 놈을 만나면 콤파스로 얼굴을 찌르고 잽싸게 튈 것이다. 아직까지 직접 쓸 일은 없었지만 몇 번 아슬아슬했던 적도 있었다. 영자네 집 근처 구부러진 골목에서 마주 오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안희의 가슴을 더듬고 간 적이 있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안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의 골목은 안심할 수 없다.
그래도 새벽공기는 나쁘지 않다. 배급소까지 조깅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뛰어간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인이 배겼다. 배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전용 가방에 담아 안희는 맡은 구역으로 뛰어간다.
자전거에 실으면 한번이면 끝나지만 안희의 구역은 재개발 지역의 맞은 편 3층 다세대 주택단지이다. 비교적 10년 안팎에 지어진 주택으로 주변에 비해 깨끗한 동네여서 재개발지역에서도 제외된 곳이다. 하지만 언덕에 계단으로 단을 쌓아 만든 동네라 자전거나 바퀴가 달린 것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안희는 어느 정도 부수를 채우려면 한번 더 배급소로 달려 가야 한다.
첫 번째 가방을 비우고 두 번째 가방을 메고 계단 위를 올라 첫 신문을 파란 대문집에 넣고 돌아서는 순간,
어떤 목소리가 안희를 불러 세웠다.
“학생! 잠깐 서 봐.”
“네? 저요?”
뒤를 돌아보니 중년의 아줌마가 팔짱을 끼고 안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신문사절>이라고 써 있는 거 보여? 안 보여?”
“아, 그게요. 배급소에서 말해 주지 않으면 저희는 무조건 넣게 되어 있어서요.”
“아니, 처음은 그렇다 치고 며칠 째 이렇게 붙어 있으면,응, 말이야! 학생도 글자는 알 거 아냐? 가서 배급소에 말을 전달하면 되는 거 아냐?”
사실 이미 안희는 배급소장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소장은 자신이 알아서 한다고 너는 빼먹지 말고 넣기나 하라고 했다.
‘알아서 하긴, 개뿔!’
안희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들어가서 전할께요.”
“아니, 도대체가 사람들이 말을 들어먹지를 않아. 내가 전화로 몇 번이나 말했구만!”
멈춰 있자 신문가방의 무게가 더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때, 파란대문을 열고 한 젊은 남자가 농구공을 들고 나와 아줌마에게 말했다.
“아이, 엄마! 이제 그만하고 보내 줘요. 저 학생이 무슨 죄야. 배급소에서 모르쇠 하는 게 뻔하지. 가방도 무거워 보이는구만.”
그러더니 안희 쪽을 향해 말했다.
“그만 가요. 힘들었겠다, 미안~!”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하고 새벽 골목길 아래로 뛰어 갔다.
"엄마, 나 오늘 아침 시합 약속 있어서. 나 간다~."
남자는 영화<타락천사>에 나오는 여명을 닮았다. 남자의 얇은 운동복 등판에는 ‘연세대’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대학생인 듯 했다. 아줌마는 자신의 잘난 아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짐짓 헛기침을 하더니
“이제 그만 가 봐요.”라고 말했다.
안희는 다음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자신의 볼에서 뜨뜻한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남자의 미소가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그 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버스정류장 앞에 양이가 서 있었다.
“왠 일?”
안희가 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말이 좀 있어서.”
양이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뭔데?”
“가면서 말하자.”
그러면서 고갯짓으로 앞장서라는 표시를 했다. 사람의 발걸음이 뜸해지는 골목에 이르자 안희의 뒤를 따라 걸어오던 양이가 입을 열었다.
“나랑 사귈래?”
“?”
안희가 뒤돌아보며 양이를 쳐다봤다.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기습 고백이다.
“너 나 안 좋아했다며?”
“바보냐? 관심 있었다고 했지. 누가 싫대.”
“난 잘 모르겠는데?”
“나 밀당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빨랑 결정해.”
“나 어제까지 너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갑자기 어떻게 사귀니?”
“그럼, 몇 번 만나보던가.”
“......”
안희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망설일 때 마침 연수 패거리가 골목 끝에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수는 안희를 보고 잘 만났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오다가 곧 양이를 발견하고멈칫 섰다.
양이가 연수 앞으로 다가갔다.
“야, 너 나 알지?”
연수는 겁먹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알지...”
연수 옆에 있던 민지, 희지도 갑자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이안희, 쟤가 내 친구거든. 내 귀에 이상한 얘기 안 들리게 잘해라. 콱 씹어버리기 전에.”
양이는 나직하게 말했는데 마지막에 ‘씹어’부분만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연수는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희는 그 장면이 통쾌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그래서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바로 골목을 뒤돌아 나왔다. 양이가 뛰어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니네 집 이쪽 아니잖아?”
“뭐 좀 사가려고. 너 이제 가.”
“그럼, 우리 또 언제 봐?”
양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희에게 물었다.
안희는 양희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내가 아니?”
양이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녀석은 쿨한 성격인 듯하다. 5년 전에도 지금도 안희의 말은 뒤끝 없이 잘 듣는다.
양이에게 둘러댄 말때문인지 안희는 갑자기 마트에서 일하고 있을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마트에 가 보니,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니네 엄마 오늘 몸이 좀 안 좋다구 전화가 와 가지구, 오늘 하루 쉬겠다던데? 딸인데 그것도 모르냐?”
마트 사장은 바쁜데 곤란하게 되었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안희는 서둘러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