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는 그 순간부터 머릿 속에 온통 양지승과 소각장, 고백 같은 단어들이 뒤엉켜 어지러웠다.
지금까지 안희에게 소각장은 결투장이었는데 이제는 고백의 장소로 느껴졌다.
그 때, 선생님이 “양지승”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안희는 수업 시간 내내 그런 단어들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양지승!”이라는 이름을 부른 것이 지금 이러한 모든 상황을 알고 부른 것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은 금방이라도
“양지승, 너 이안희 좋아하면 떳떳하게 고백해!”
라는 말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선생님은 무덤덤하게
“페이지 63쪽 크게 읽어보도록!”
이라고 할 뿐이었다.
양지승은 햇살을 받아 눈부셨고 쌍커플이 짙은 눈을 소처럼 꿈뻑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겉모습만 보면 순정만화 속 주인공 같았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그러지 못했다. 변성기가 시작되어 갈라진 새된 소리에 읽는 솜씨도 유창하지 못해서 마치 방금 한글을 배운 1학년생처럼 더듬거렸다.
순간, 안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어떤 환상이 왕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양지승이라는 아이는 멀끔한 얼굴에 싸움만 잘하는 아이이다. 한글도 모르는 지진아.
아무리 싸움을 잘하고 다른 남자애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하더라도 저런 남자애를 좋아할 수는 없다. 어쩐지 아침부터 붕붕 떠오르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 안희는 쪽지를 들고 양지승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거 니가 보냈어?”
양지승은 주변을 살피며 당황해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할 말 있으면 지금 여기서 해.”
양지승은 물끄러미 안희를 바라봤다.
“니가 말 안하면 내가 말할게. 난 양부인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남편 둔 적 없으니까.”
양지승의 얼굴을 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양지승 옆에 있던 정성호가 되려 큰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이 년이 미쳤나. 너 양이 아니었으면 저번 중에 나한테 뒤졌어!”
“야, 너 말을 어떻게 그 따위로 못 되게 하냐?”
겁쟁이 철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안희는 아랑곳 안하고 고개를 쳐들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못 됐다고? 사람없는 데서 이상한 소문내고 다니는 건 잘하는 짓이니? 패고 싶음 지금이라도 어디 패봐!”
정성호가 양지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내가 저번 중에 말했지? 저게 얌전해 보여도 한 번씩 저렇게 또라이라니까? 쟤가 뭐가 좋냐? 얼굴도 못 생겨가지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양지승이 순간, 정성호를 째려봤다. 정성호는 바로 기가 죽어서 시선을 피했다.
“여하튼 나 오늘 소각장 안가. 앞으로도 부를 생각하지 말라고.”
안희는 그대로 휙 돌아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체면을 구겼으니 양지승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자신에게 복수를 하려 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손버릇 나쁜 사람하고는 아예 연도 맺지 마라. 배운 거 없고 힘만 쎈 사내 놈들에게 절대 잡혀 살지마. 너는.”
안희는 지금 당장 남자 아이들과 싸우다가 몇 대 맞는 것보다 엄마 말대로 그들과 인연을 맺는 것이 더 두려웠다.
당시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허공에 사라진 첫 로맨스 사건이 크게 아쉽지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비장한 각오로 정성호를 비롯한 많은 남자아이들이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맞서 싸우자라는 이상한 결심이 더 강했다.
하지만 조용했다.
양지승은 더 이상 쪽지를 보내오거나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안희를 양부인이라고 불렀고 어떤 남자아이도 안희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양지승은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상태로 졸업까지 지내다가 서로 여중, 남중으로 배정 받은 이후로는 더더욱 마주칠 기회도 없고 볼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놀이터에서 만나기까지 5년의 시간이 흐르게 된 것이었다.
“이제 기억나냐?”
그 양지승이 지금 안희 눈 앞에 싱글거리며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