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의 도움으로 오늘은 배달일이 한결 쉬웠다. 파란대문 집을 지날 때 문짝에는 여전히 <신문사절>이 붙어 있었지만 안희는 또 신문을 넣었다. 다행히 아줌마가 다시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에 농구공 남자와 또 마주쳤다. 남자는 안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또 보네요.”
살짝 스치듯 한 인사였는데 양이는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저 놈은 또 누구냐?”
“나도 잘 몰라. 대학생 같은데. 저 집 아들이겠지, 뭐.”
“난 저렇게 싱글거리는 놈을 보면 기분 나쁘더라.”
“뭘 싱글거렸다고...”
“너 재한테 관심있냐?”
“뭐래냐? 어제 처음 본 사람이거든.”
“아,씨. 너 그래서 나랑 사귈거야? 말거야?”
“만나보면서 생각해보라며.”
“그럼, 나 만나는 줄 거야?”
마침, 마지막 신문배달이 끝났다.
“오늘 도와줬으니까 내가 커피살게. 따라와.”
안희는 구멍가게에서 캔커피 2개를 샀다. 그리고 둘은 동네 꼭대기에 있는 놀이터에 가서 앉았다. 새벽에서 점점 아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높은 곳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다가 건너편에 포그레인으로 집을 부수고 있는 안희의 동네가 보였다. 위쪽부터 천천히 집이 부서지고 있었다. 안희의 집도 이제 멀지 않았다. 집을 구해야할건데. 아빠도 엄마도 대책이 없어 보였다.안희는 이사를 간다면 엄마하고만 가고 싶었다. 더 이상 아빠와 함께 있다가는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캔커피를 한모금 삼키며 안희는 고개를 돌려 양이를 보았다. 양이는 커피는 이미 원샷을 하고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
“너 나 지켜준댔지?”
“그치, 근데 나랑 안 사귀어도 다른 놈들이 너 못 건드리게는 할거야?”
“왜?”
“그냥.”
“바보, 그냥이 어딨어.”
“넌 뭘 다 하는 사람처럼 말하더라.”
“내가?”
“내 속을 다 아는 사람 같아.”
“나 그런 능력없어.”
“너 우리 엄마랑 좀 닮았어.”
“너네 엄마?”
“응.”
안희는 자신의 볼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니네 엄마랑 닮았어?”
“얼굴말고. 우리 엄마 캡 이쁘거든.”
“아, 그러셔.”
안희는 머쓱해져서 입맛을 다셨다.
“성격이 닮았어.”
“지랄 맞으셔?”
“조금? 그랬었어.”
“지금은?”
“돌아가셨어.”
“아.”
안희는 어떻게 뒷말을 이어야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 엄마, 술집에서 일했거든. 좀 성격이 쎄서 술집 오는 남자들이랑 자주 싸웠어. 그러다가 어느 날은 미친 놈이랑 엮여서. 칼 맞고 돌아가셨어.”
양이에게는 힘든 기억일 텐데도 남 말하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넌 그럼 어떻게 살아? 아빠랑?”
“아빠가 누군지 몰라. 술집여자 아들인데 누가 아빤지 알게 뭐겠냐. 그냥 삼촌들이랑 살아.”
“삼촌?”
“진짜 삼촌들은 아니고, 엄마하고 아는, 삼촌들.”
“너도 힘들었겠다.”
“뭐, 힘든지는 모르겠어.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널 보면 좀 그래.”
“뭐가?”
“니가 누구한테 얻어터지고 다니는 거 못 참겠어.”
안희가 한숨을 쉬었다.
“너 사람 죽여본 적 있어?”
“야, 아무리 그래도 나 고등학생이야. 싸움은 좀 해도 아직 그런 단계는 아냐. 뭐, 고등학교 졸업하면 삼촌들이랑 같이 일할 수도 있겠지만.”
“나, 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
양이가 철봉에서 내려와 안희 옆에 섰다.
“니가 날 도와주면 나 너랑 사귈게.”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야?”
“너보고 죽이라는 거 아냐. 그냥 좀 도와 달라는거야.”
“도대체 누굴?”
“우리 아빠”
안희는 놀이터밖으로 걸어 나갔다.
양이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