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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동네01

사진

by 임쓸모

그곳의 사진을 남겨두었다.


얼마전 큰 인기를 끈 <응팔>의 배경이 되었던 쌍문동.

거기서 멀지 않은 <삼양동>에서 나의 유년기도 흘러가고 있었다.


쌍문동보다 더 높은 산동네.

간혹 친척들이 방문하게 되면 25번 버스 종점에서부터 우리집까지 이르는 고각의 언덕길과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의 계단길을 안내해야 했다. 어릴적부터 다람쥐새끼마냥 뛰놀던 곳인 나는 고각이든 계단이든 전혀 힘들지 않았지만(나름 손님들을 위해 천천히 걷기까지 한걸)뒤쫓아 오는 이모 삼촌 혹은 사촌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손사래를 치며 쉬었다 가길 원했다.

평지에 사는 전라도 큰 이모네는 "이런데도 집을 짓는다냐?"하며 신기해했다.


무릇 산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했다.

대부분은 한철 바짝벌어 1년을 사는 요꼬쟁이들이었다.'요꼬쟁이'를 좋은 말로 바꾸면 <편직물 가내 수공업 프리랜서>정도 되겠다. '요꼬'라는 말은 일어로 '옆으로'라는 뜻이다.

편직물 수동기계는 무거운 쇳덩이로 만들어져 있고 기계의 손잡이를 '옆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스웨터를 짜기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고 바늘 수도 외워야하고 쇳덩이를 오직 팔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된 노동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기가 좋았던 80년대였고 큰 공장에 속한게 아니라 기계를 가지고 가내 수공업장같은 작은 공장에서 따온 일을 능력껏 해서 장당 얼마를 받는 식이었으므로 당시 공순이 공돌이 중에서는 프라이드가 쎘다고 우리 엄마가 그랬다.

여하튼 일거리가 많은건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겨울부터 초봄까지는 좀 한가했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살아야했다.


다들 형편이 거기서 거기였던 동네.

그러나 다들 가진 사연은 가지각색이었던 그 동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모두 떠나간 그 동네를 우리가족도 서둘러 떠났다.겨우 옆동네 빌라로 옮겼을 뿐이었지만.


여하튼 모든 철거민이 떠난 후 한참 집들을 허물고 있을 무렵 아빠가 옛날에 살던집에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이사를 총 세번 다녔는데 두번째 세번째집은 이미 흔적이 없었고 내동생이 태어나고 내가 일곱살까지 살았던 첫번째 집은 남아 있었다. 흡사 전쟁이 끝나고 난 폐허 같은 곳을 배경으로 우리 식구는 가족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집을 빠져 나오려는데 아빠가 날 불러세웠다.

"어이~큰딸 여기 한번 서봐라. 한장 박게.나중에 보면 재미있을거야."

아빠가 가리킨 곳은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나무로 된 문이었다. 그 문엔 w.c.라고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4살 무렵 찍은 화장실 앞의 사진. 그 사진 속의나는 바가지 머리에 오동통한볼,노란색 폴라티에 빨간 골덴바지를 입고 한껏 골난 표정을 하고 있다.

아마 찍기 싫은 걸 억지로 찍었나보다.


스물 네살의 내가 당시 신상패딩조끼를 입고 한껏 멋을 낸 모습으로 웃으며 다시 그 화장실문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빠는 그 사진을 나란히 앨범에 꽂아두고 보며 지금도 좋아라 하신다.


이젠 다시 볼 수없는 유년 시절의 내 동네.

꿈속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나의 동네.


우리동네,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한다.




사진출처:do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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