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안희는 가방을 벗어 놓고 가스렌지 위에 라면물을 올렸다.
안방의 TV를 켜자, <카드챕터 체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걸
안희는 만화의 주제곡을 들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아무도 없는 게 좋았다. 엄마의 한숨소리나 아빠의 욕이 없다는 것이.
아빠가 집에 없으면 또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기에 그다지 좋은 징조라 할 수 는 없지만 우선은 집에 혼자라는 것은 좋았다.
미래의 불안을 저당잡힌 현재의 달콤함이라고 안희는 생각했다. 자신이 부모를 제어할 수 없으니 당면한 달콤함은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
끓는 물에 라면과 수프를 넣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앉은뱅이 식탁을 차린다. 냄비바닥에 깔 신문지를 올리고 다 끓여진 라면 냄비를 소맷부리를 당겨 옮기는데 TV 옆 빨간 전화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뭐해?” 영자였다.
“응,라면 먹을라고.”
“집에 혼자야?”
“응. 근데 우리집 그 새끼 언제 돌아올지 몰라.”
“큭큭. 나도 니네집 갈 생각 없거든? 있다가 8시쯤 삼거리로 나올래?”
“야밤에 왠 일?”
“야! 8시가 무슨 야밤이야? 그냥 산책 좀 하자는 거지. 너 삼성공고 알지?”
“그 똥통 학교?”
“똥통학교면 어때? 내가 거기 다니는 애들 중에 좀 잘 나가는 애들을 알거든.”
“잘 나가다니. 그래봤자 양아치겠지.”
“아냐, 걔들이 공부는 좀 못해도 아주 막 양아치는 아니야.”
“그래서? 뭐 미팅이라도 하냐?”
“미팅은 무슨 촌시럽게. 그냥 건전한 대화 좀 나누자는 거지.”
“아,몰라. 분위기 봐서.”
“삼거리에서 8시 10분까지만 기다린다. 알았지?”
“알았어, 끊어. 라면 불어.”
전화를 끊고 <카드쳅터 체리>를 보며 후루룩 라면을 삼켰다.
초등학생 주제에 연애라니...현실성 제로인 만화지만 예쁘긴 하다. 만화 속의 인물들도 그들이 사는 저 세계도.
왠지모를 부러움을 느끼며 마지막 라면국물을 맛있게 들이켜고 있을 때 우리집 그 새끼, 아빠가 돌아왔다. 다행히 술은 안 마신 듯 하다.
“밥 안 먹고, 왜 라면을 먹어?”
“......”
“끓인 김에 아빠것두 물 올려라.”
안희는 조용히 라면만 끓여 바치고 얼른 2층 옥탑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방금 안희가 앉았던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TV는 어느새 야구중계로 채널이 바뀌었다.
안희는 라면을 끓여 상 위에 놓았다.
“야, 이년아! 김치도 새로 꺼내야지. 어째 넌 일일이 설명을 해줘야하냐? 멍청한 년.”
안희는 김치 그릇을 가져와 김치를 덜어 다시 식탁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러다가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김치 그릇을 세게 놓는 바람에 김치 국물이 튀어 상 위에 떨어졌다. 바로 그 때 뒤통수가 뜨끔했다. 아빠의 손바닥이 날아온 것이었다.
“이년이, 애비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 지 에미가 애비를 무시하니까 아주 그냥 쪼끄만 년까지 애비를 아주 우습게 알지!어?! 아주 김치를 엎지그러냐! 이년아!”
아버지는 앉은 채, 씩씩거리며 안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희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안희가 힘겹게 입을 떼자, 아빠는 그제야 안희에게서 눈을 떼고 젓가락을 들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안희는 몇 분 더 그 자리에 서 있다가 2층 옥탑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옥탑방에 들어서자마자 안희는 서둘러 문을 잠그고 이불로 쓰러져 누웠다.
안희는 아무리 슬퍼도 화가 나도 남 앞에서 잘 울지 않는다. 그건 자신이 세운 철칙이다. 우는 건 약한 거니까. 약하면 지는 거니까. 안희는 남 앞에서 절대 울지 않기로 한다.
그냥 마음속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흘려보낸다. 스스로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되뇌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괜찮아진다. 적어도 괜찮은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이 방에서는 아주 조금 운다. 오늘은 평소보다 운이 없었으니까. 연수한테도 아빠한테도 얻어터진 날이었으니까. 조금쯤 울어도 괜찮다.
엎드려 훌쩍이다보니 가슴팍에 뭔가가 안희의 여린 살갗을 찔러온다. 안희는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가슴사이에 끼워진 지폐를 꺼낸다. 오늘 아침 신문 배급소에서 엄마가 가불해간 돈을 제하고 받은 5만원 중 일부이다. 만원은 필통에 넣어두고 2만원은 가슴팍에 2만원은 뜯어진 교복 앞주머니 안감 안쪽에 넣어두었다. 돌돌말린 지폐 2만원을 펼치면서 안희의 얼굴에서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영 최악의 날은 아니네. 연수년에게 만원만 뺏겼고 아빠는 아직 오늘이 월급날인지 눈치도 못 챈 것 같으니.’
안희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진다. 볼이 좀 붓기는 했지만 원래 동그스름한 얼굴이라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다.
입술도 약간 터지긴 했지만 뭐. 그런대로 나빠 보이지 않아 보인다.
‘기분전환 삼아 영자 말대로 삼거리에나 나가볼까?’
안희는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낀다. 아마 엄마가 돌아왔나 보다.
아빠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으니 집안이 또 시끄러워질 것이다.
좋아, 나가자.
안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앞머리를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