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몇 집 남지 않았다. 담벼락에 락카로 숫자가 휘갈겨진 집들은 주인들이 서둘러 어디론가 떠나고 모두 빈집이다. 이제 남은 건 안희네 집과 현이네집, 그리고 전봇대 옆 골목의 몇 집이 있을 뿐이다. 그들도 곧 새 집을 찾아 이삿날을 받아놓고 있었다.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집은 안희네집 뿐일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터덜터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며 안희는 반쯤은 허물어진 집과 그 사이로 삐져나온 버려진 살림살이들을 곁눈으로 살폈다. 이미 너무 낡거나 필요 없어진 물건들이 선택받지 못하고 허물어질 집들과 함께 버려져 나뒹굴고 있었다. 대개는 다 닳은 양은 냄비나 귀퉁이가 쪼개진 고무다라이같은 부엌 살림이었는데 어느 집 담벼락밑에는 책더미들이 있었다. 안희는 책더미로 다가갔다. 노리끼리해진 삼중당 문고판들이었다.그 중에 안희의 눈을 끈 제목의 책은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안희는 주변을 살펴봤다. 집을 허물던 인부들은 어딘가로 가서 쉬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렴, 버리고 간 물건인데 좀 주워가면 어때?’
안희는 문고판 더미앞에 쭈그려 앉아 <슬픔이여, 안녕>을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사강 지음이라고 써 있었다.
‘작가이름이 사강. 특이한 이름이네.’책 날개를 펴자 작가 소개와 더불어 앳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예쁘장한 그녀의 얼굴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에 맨 가방을 끌러 책을 집어 넣는데 그 때 뒤에서 안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안희!" 연수패거리였다.
“가방에 뭘 주워 넣고 있냐?”
키가 안희보다 머리하나 밑일 정도로 키가 작은 연수는 항상 혼자 다니지 않았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희지, 민지랑 다녔는데 그 아이들은 언제나 연지의 양 옆에서 오만상을 쓰고 있어 이름과 참 안 어울리는 면상이라고 안희는 늘 생각했다.
“책!”
“지랄, 니 주제에 무슨 책이냐?”
연수는 시비조로 말하며 땅바닥에 잇사이로 침을 뱉었다.
“내 주제가 뭐 어때서? 학생이 책읽으면 좋지.”
“미친년! 됐고, 언니 용돈 좀 내놔라~”
“미친.내가 너 줄 돈이 어딨냐?”
“아, 썅! 오늘 신문배달 월급나오는 거 다 알거등. 까불다 맞는 수가 있으니 우리 신사적으루다가 조용히 내놓자.”
“그거 벌써 우리 엄마가 가불해가서 얼마 안되거든? 남은 걸로는 나 버스타고 다녀야 돼.걸어서 학교 다닐 수는 없잖냐. 그리고 너나 나나 다 같은 여잔데 신사는 무슨.”
“아, 씨발! 더럽게 따지네. 글구 니네 집구석은 뭐 그 따위냐? 아주 딸내미 등쳐 먹는 집안이구만.”
“사돈 남말하네.”
“아, 씨발. 버스고 뭐고, 일단 너 좀 맞자!”
연수가 고개를 까딱하자 오만상의 희지와 민지가 안희의 양 옆으로 다가와 단단히 팔짱을 꼈다. 시작은 연수가 점프하듯 뛰면서 내리치는 찰진 싸다귀였다. 짝!
연이어 반대편에서도 연수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곧이어 안희의 양볼이 화끈거렸다. 어떻게든 반격하고 싶었지만 희지와 민지의 손아귀 힘이 쎄서 옴싹달짝 할 수 가 없었다. 연달아 뺨을 올려치던 연수가 마지막으로 안희의 배를 걷어찼다. 안희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그제야 희지와 민지도 손을 놓았다. 길바닥에 배를 감싸쥐고 엎드려 있는데 연수는 안희의 배낭을 낚아챘다. 배낭 문을 열고 뒤집어 흔들자, 방금 넣었던 <슬픔이여, 안녕>책과 교과서, 공책, 필통들이 쏟아졌다. 연수는 책 사이를 휘리릭 훑어 보더니 필통을 열었다.
그러더니 필통 속의 커터칼을 손에 쥐고 안희를 보며 빙긋 웃었다. 오싹한 미소다.
그러다 눈길을 돌린 연수는 필통 속의 접힌 만원을 발견했다.
“썅년, 진작에 이거라도 내놨으면 좋았잖아. 내 에너지 소모 어쩔거냐? 응, 씨발. 패는 것도 존나 힘들어. 알어?”
연수는 커터칼과 필통을 집어 던지더니 만원을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명심해라! 항상 언니 용돈은 챙겨서 다녀. 알겠냐?”
연수 패거리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 안희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방문을 열어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볼에서는 열이 나고 입가에 찝질한 피맛이 났지만 안희는 울지 않았다. 안희에게 이런 일은 그냥 일상다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