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배꼽티와 후드티

by 임쓸모

옥탑을 내려오는 난간은 바깥 화장실의 지붕이기도 했다. 어릴 적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이 계단이 커다란 크루즈선을 오르는 계단이라고 상상하곤 했었다. 나는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라는 상상. 그야말로 어린 시절의 멋지고 부질없는 환상. 지금은 그런 상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난간을 내려서 돌아 화장실 문 앞을 지나면 대문이자 현관문이며 동시에 부엌문이기도 한 샷시문이 있다. 이집은 비탈에 지어져서 반지하 같다. 그러니까 지평선이 가로가 아니라 대각선인 반지하인 셈이다. 마당도 없고 현관문을 열면 작은 포터 트럭이 다닐만한, 시멘트로 거칠게 포장된 행길가가 바로 펼쳐진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차가 다니는 길갓집이라 계단있는 골목길 집보다 조금 더 비싸다고 했던 집주인의 말이 생각난다. 그때까지만해도 안희네집 형편은 지금보다는 좀 나았다.


안희는 자신이 집을 나서는 걸 문을 열어 엄마에게 알릴까 말까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벌컥 문이 열리며 엄마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왔다.

“다 저녁에 어딜 가려고?” 엄마의 눈이 푹 꺼져 피곤해보인다.

“음..영자가 삼거리 아트박스에 알바 구한다고 한번 가보자고 그래서...”

안희의 아르바이트비가 집안 살림에 쏠쏠한 도움이 되는 터라 엄마는 말리지 않는다.

“너무 늦게 하는 시간이면 하지 말어. 안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는데....”

엄마는 안희에게 하지말라고는 차마 말 못하고 미안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시선을 돌린다. 안희는 그 모습에 거짓말한 것이 조금 켕긴다.

“그럼, 다녀올게.”

“그래. 너무 늦지는 말고.”

엄마는 문가에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 다시 들어간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안희의 뒷통수에 “지 년이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유세야! 유세는!”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낮에는 동네 마트에서 캐셔일을 하는 엄마는 잠시 쉬다가 식당 마감 알바를 하러 나갈 것이다. 조금 편히 쉬게 해주면 좋으련만. 아빠는 그 꼴을 못보고 또 사람을 괴롭힐 것이다.

술을 먹지 않으면 앞뒤 없는 욕설과 잔소리를 하고 술을 마시면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사람을 패거나 하다가 혼자 속 편하게 잠드는 그런 인간이다. 안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빠는 항상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런 아빠를 대하는 안희의 원칙은 이러했다. 되도록 마주치지 말 것. 마주친다면 최대한 말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치지 말 것. 때리면 반항없이 그냥 몇 대 맞을 것. 조금 잠잠해지면 방으로 들어와 숨을 것.

아빠는 나름의 이유로 2층 옥탑방까지 따라와 행패를 부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안희와 엄마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2층 자신의 옥탑방이었다. 엄마가 잠시라도 자신의 방에서 쉬었다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안희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 집 밖을 나오면 안희는 마음이 편했다. 연수 패거리를 만난다면 좀 피곤해지겠지만 하늘에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그 면상들을 하루에 두 번을 만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참을 걸어 안희는 삼거리 횡단보도 앞에 도착해 아트박스 앞에 배꼽티를 입고 서 있는 영자를 보았다.


“미친, 야, 배 안 시렵냐?”

“시렵긴 이제 조금 있음 오뉴월 한 여름인데. 뭐 어때? 이쁘지? 채리나같지 않냐? 지난 주에 명동 가서 하나 샀어.”

“으이구, 니가 좋으면 입는 거지, 내가 말린다고 니가 안 입겠냐.”

“아~ 지지배. 너도 좀 신경 좀 쓰고 나오지. 이게 뭐냐? 자다 나왔니?”

영자의 말에 안희는 자신의 차림을 살펴 보았다. 일자청바지에 검정 후드티. 나름은 지난 설에 엄마가 사준 새 옷인데....아닌게 아니라 후드티가 좀 덥게 느껴지긴 했다. 벌써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는 걸 안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신문배달을 나가는 새벽에는 아직 싸늘한 공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후드티가 계절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것이다.


“됐어. 뭐 선보러 나왔냐.”

“여하튼 좀 꾸미면 훨씬 이쁠텐데...근데, 너 뭐야? 얼굴 왜 이래?”

영자가 안희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부은 볼과 터진 입가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머, 너 또 누구한테 맞았니?”

“뻔하지, 뭐. 많이 티 나?”

“야, 또 연수 그 기지배냐? 아님 아빠?”

“둘 다.”

“하여튼 왜 당하고 살아! 너도 좀 들이 받지.”

“희지, 민지가 옆에 떡 들러붙어 있는데 그게 쉽냐? 성격 같았으면 벌써 들이 받았지.”

“그니까 아예 초장부터 확 잡았어야 돼. 그 년이 널 아주 봉으로 아는 게 틀림없어.”

영자도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즈음 연수에게 삥을 뜯기고 몇 대 맞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영자 엄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학교에 찾아와 담임 선생에게 얘들 똑바로 교육 못 시키느냐고 그 큰 덩치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당사자인 연수에게 직접 찾아가 “영자 다시 건드렸다가는 내가 니 년 엄마한테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하고 엄포를 놓고 돌아갔다. 영자 엄마는 재개발지역인 안희의 집 맞은 편 연립주택가의 반장이었다. 그것도 10년 연속 반장. 동네에서 영자엄마에게 찍히는 이웃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영철이 엄마, 쓰레기를 이런 식으로 내놓으면 안돼. 들고양이들 꼬이 잖아! 단도리를 잘해야지. 자기야! 동네 그지 꼴 되는 거 순식간이다~!”

“수미 할머니, 골목길에 고추를 이렇게 널어 놓으시면 어떻해요? 지나다니기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동네 미관에 안 좋아요. 마당에 자리 없으시면 옥상에다가 좀 말리시던가!”

영자 엄마는 시시콜콜한 것에 다 간섭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되도록 영자 엄마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앞에서는 적당히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최대한 책잡힐 일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서인지 연수는 영자엄마의 경고를 매우 잘 받아들인 것 같았다. 다시는 영자에게 손대지 않았다. 하긴 영자 엄마에게 찍힌다면 동네에서 편하게 살긴 그른 것이다. 하지만 연수가 영자를 건드리지 않는 반작용으로 영자와 친한 안희를 더 괴롭히게 된 면도 있었다. 해맑은 영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안희는 억센 영자엄마의 그 기세 등등함이 부러웠다. 반대로 안희의 엄마는 동네에서 투명인간과도 같았으니까.


영자는 그런 엄마가 있어서인지 걱정이나 두려운 게 없어 보였다. 공부에는 애초에 뜻이 없어 상고에 간 이후로 관심분야인 미용기술이 나날이 늘어 이제는 제법 수준급이었다. 영자는 급히 안희를 골목길로 끌고 들어가 자신의 가방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내 안희의 볼에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그래도 명색이 신영자 친군데 이건 심하지.”

영자는 안희의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다 바르자 다시 립글로스를 꺼내 발라주며 부산을 떨었다.

“그래, 이제 좀 낫네.”

영자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려는 듯 안희의 얼굴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그 때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남자 아이들이 보였다.영자는 그들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반갑게 흔든 손이 무색하게 그들은 멀리 떨어진 채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영자가 안희와 팔짱을 낀 채 앞서 걸었다. 코너를 돌면 동사무소 앞 놀이터가 나온다.

“잠깐, 그냥 가면 심심하지.”

영자는 휙 돌아 남자 아이들에게 다가가더니 그 중 한 명에게 손을 내밀어 돈을 받아왔다.

그리고 작은 구멍가게로 안희를 끌고 들어가 소주2병과 맥주 6캔을 계산대에 올렸다.

계산대의 물건을 보고 주인 할머니가 안경너머로 영자와 안희를 올려다 봤다.


“니들 학생 아니냐?”

“아니..”영자의 말을 안희가 막았다.

“학생 맞는데요. 우리가 먹을 거 아니고요, 아빠 심부름이예요.”

“그래도 요즘 학생한테 술 팔면 안되는데.....”할머니가 머뭇거렸다.

“할머니, 좀 봐 주세요. 이거 안사가면 저 아빠한테 또 뒈지게 맞아요.”

안희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주인할머니의 눈을 바라봤다.

할머니는 검은 봉지에 술을 담기 시작했고 영자는 방금 남자애한테 받은 돈으로 값을 치뤘다.

“오호~! 연기 쫌 하는데?”

영자가 가게 밖을 나서며 귓속말로 말했다.

“이런 게 진정한 생활연기 아니겠니?”

안희는 술심부름하던 게 도움이 되는 날도 있다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