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놀이터는 아늑하고 조용했다.
영자와 안희는 그네에 앉았고 교복을 입은 남자 얘들은 바닥에 앉았다.
“재주 좋은데~ 술도 다 구해오고.”
남자아이들 중에 키가 제일 큰 민철이 맥주캔을 따면서 말했다.
“응, 우리가 쫌 해~”
영자는 뭔가 큰 미션이라도 해낸 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근데, 안주는 없나?”
빨간 뿔테 안경을 쓴 인규라는 아이가 검은 봉지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야, 인간적으로 그 돈으로 안주까지 어떻게 사오냐?”
영자는 자신의 업적에 금이라도 간 냥 인규를 째려봤다.
“야, 그래도 맥주는 몰라도 깡소주는 좀 심하지. 안되겠다. 가서 새우깡이라도 좀 사와야지. 양아,같이 갈래?”
인규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다.
“그냥 혼자 갔다와. 코 앞인데 기지배들도 아니고 뭘 몰려 다녀.”
민철이가 양이 대신 대답하자 인규는 터덜터덜 담배가게 쪽으로 걸어간다.
그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앉아있는 양이라는 남자아이를 안희는 찬찬히 뜯어 보았다.
미간의 점만 아니라면 탤런트 최수종을 닮았다고 할 수 있는, 이목구비가 선명한 잘 생긴 얼굴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지만 최수종을 닮아서 그런 걸 거라고 안희가 나름의 결론을 내려고 할 때
양이가 입을 열었다.
“너 나 몰라?”
안희가 어리둥절해져 물었다.
"내가, 널 아니?”
“삼미 국민학교 6학년 2반 양지승이잖아.넌 이안희고.”
그러자 영자가 껴 들었다.
“어머, 그럼 너네 동창이야? 하긴 코딱지만한 동네에 건너 건너 다 아는사이지.뭐”
안희는 양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렴풋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당시에 안희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을 무척 싫어했다. 그들은 시끄럽고 야만적이고 음란하며 무엇보다 폭력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안희가 제일 싫었던 것은 브래지어 줄을 잡아당기는 일명‘브라자’장난이었다.
이제 막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한 여자아이들이 하나 둘씩 브래지어를 차기 시작하면서, 남자아이들은 뒤에서 수근대고, ‘젓소부인’이라며 놀리고, 몰래 등 뒤로 다가가 브래지어 끈을 뒤로 휙 세게 잡아당겼다가 놓는 장난을 했다. 그 행위는 여자아이들에게 신체적 아픔보다 부끄러움을 주었다. 왜 그것이 부끄러워야할 일인지는 모르지만 여자아이들은 당연히 그 장난을 싫어했다. 어떤 여자 아이들은 자리에 주저 앉아 우는 일도 종종 목격되었다.
그러니까 그 날은 안희가 처음으로 브래지어를 한 날이었다. 안희는 아직 그리 크지도 않은 가슴인데 굳이 눈에 띄게 브래지어를 하고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시장에서 예쁘게 포장까지 해서 사 온 브래지어를 거부할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브래지어를 입고 학교에 갔다. 처음 착용하는 브래지어는 갑갑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썩 기분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뒷자리에 앉은 까불이 정성호가 ‘브라자’장난을 걸어 왔다.
“야! 젖소부인!”
정성호가 브라자 끈을 잡아당겼을 때 안희는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엎드려 울지 않았다.
대신에 바로 정성호의 손을 틀어잡고 반대 손으로 뺨을 세차게 올려 부쳤다.
교실 안에 찰진 마찰음이 퍼지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곧이어
“이, 씨발년이!” 정성호가 단박에 안희의 머리끄댕이 잡았다.
안희는 머리가 잡힌 상태에서 정성호를 노려보았다.
“눈깔아, 이년아.”
“싫다, 이 미친놈아!”
그렇게 한참을 둘이 서로 노려보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말리기 시작했지만 둘은 꼼짝도 안했다. 마치 소싸움에 힘겨루기를 하는 두 마리의 황소처럼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상태에서 서로를 한참 노려보았다. 절대 질 수 없다는 듯이.
마침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둘은 계속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싸움을 눈치 채기 전에 둘은 어느 누구 먼저랄것 없이 손에서 힘을 빼고 각자 자리에 앉았다. 안희의 손에는 한 웅큼의 정성호의 머리카락이 감겨 있었다.
정성호가 이를 갈며 뒤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너 이따가 학교 끝나고 두고 봐! 결투다!”
안희는 단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빠진 머리 카락을 빗어 모으며 복화술이라도 하는 듯 이를 꽉 물고 대답했다.
“누가 쫄 줄 아냐? 두고 보자는 놈 하나도 안 무서워.해봐! 어디!”
암묵적인 결투 장소는 언제나 쓰레기 소각장이었다.안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면 어쩐지 비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잘못한 것이 없으므로 당당히 맞서리라. 맞는 것쯤은 이미 이골이 났으니까. 남자아이를 상대로 싸워서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데 까지 반격은 해 볼 심산이었다. 그래서 소각장으로 향할 때는 이미 어느 정도 각오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 정성호는 없었다.
잔뜩 벼르고 왔는데 상대가 없자 조금 맥이 빠졌다.
녀석이 잊어 버린 걸까? 그냥 갈까?뒤늦게 와서 나보고 튀었다고 소문내는 건 아닐까? 별 생각이 다 하고 있을 때,
정성호의 단짝 친구 철진이 뛰어왔다. 철진이는 키도 작고 싸움은 잘 못 하지만 남자애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귀여움을 받는캐릭터이다. 철진은 숨을 헐떡이며 안희에게 말을 전했다.
“야, 너 오늘 그냥 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