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써 그리스도교가 단지 유대교의 한 분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인 것을 알리고 이론을 정립한 인물입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기에 많은 분들이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좀 덜 알려진 내용 위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가장 훌륭한 대랍비(라반)이었는데, 예수님 당시 4명밖에 없던 직책이었고, 가말리엘은 그중 최고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주장하는 구약에서 예언된 구세주가 나사렛 예수라는 해석에 대해 권위가 실릴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이러니입니다. 그의 구약 율법에 대한 지식이 큰 효과가 없는 지역으로 선교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죠. 모르긴 해도 그는 그렇기에 더욱다 본인의 지식보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을 것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의 지도자는 오히려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과 목수의 아들에게 맞겨졌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 둘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말이죠.)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강력한 빛과 음성을 듣고 엎드러지면서 회심을 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사도행전에는 총 3번에 걸쳐 묘사가 되고 있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이 3번의 묘사가 서로 미묘하게 엇갈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도 바울 혼자만 빛을 보았는가? 혼자만 음성을 들었는가? 혼자만 엎드러졌는가?에 대해 사도 바울 조차 묘사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죠.
1) 사도행전 9장 2~7절
-. 사도 바울은 빛과 음성을 듣고 혼자 엎드러졌고, 주변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서있기만 함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2) 사도행전 22장 5~9절
-. 사도 바울은 빛과 음성을 듣고 엎드러졌고, 주변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소리는 듯지 못함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3) 사도행전 26장 11~18절
-. 사도 바울과 주변 사람이 모두 땅에 엎드러짐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던 이유는,
이 당시의 기록하는 방법은 현대 시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미리 언급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어디서나 종이로 된 수첩과 필기구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말하고 경험한 것을 6하원칙에 의해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적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2천년 전에는 정확한 사실보다 "의도"가 더 중요한 미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본인 입으로 본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듣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을 하고 있고, 이것이 그 당시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는 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적이 없습니다. 즉 예수님이 직접 불러서 뽑은 제자는 아니라는 것이죠. 또한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의 체험 전까지는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기에, 그의 사도성은 항상 의심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그는 갈라디아서 처럼 여러 목회 서신의 제일 앞에 자신에 대한 소개를 꼭 강조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참고로 자신의 사도성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베드로가 쓴 베드로전서를 보시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위에서 보듯이 베드로는 자신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딱 이 구절 하나면 됐죠.
사도 바울은 또한 글은 잘 쓰는 데 말은 잘 못하다는 비판을 자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5~6)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4번 편지를 보냅니다.
그 중 두개가 멸실되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첫번째 편지 : '이전 편지'(고전 5:9)
두번째 편지 : 고린도전서
세번째 편지 : '눈물의 편지'(고후 2:4)
네번째 편지 : 고린도후서
(고후 10~13장이 또다른 편지여서 총 5번 편지를 보냈다는 의견도 있음)
놀랍게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를 상대로 싸우는 검투경기에 참가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이것은 바울이 직업적인 검투사였다기보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으로 인한 박해로 잡힌 다음 맹수와 싸우도록 내몰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살아나왔다는 것이 또다른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은혜만을 강조하는 바울의 신앙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로마 교회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그럼에도 편지를 보낸 이유는 교제를 위함도 있고, 가르치기 위함도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바울은 서바나 지역, 지금의 스페인 지역에 선교를 하려 하였고, 그러기 위해 중간에 거쳐가기 위함이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교회를 방문했을 때 얼마만큼의 후원과 지원을 바라는 것도 있었고요.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롬 15:23~28)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음"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3장 8절을 보면 이미 바울에 대한 오해가 퍼져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결과적으로 바울의 서바나 선교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복음과 신앙관을 설파하는 과정에 위대한 로마서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로마서를 통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이론이 세워졌고, 마틴 루터 역시 이 로마서를 통해 종교개혁의 발을 내딛은 것을 보며,
고난과 오해, 어려움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번 묵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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