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제일 처음은 복음서로 시작되지만, 실제로 복음서가 쓰여진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수십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쳤죠. 그리고 그 사도들 중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굉장히 먼 거리를 선교를 위해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지리적인 한계로 갈 수 없을 때에는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바른 가르침을 주었죠. 그리고 그 편지들이 현재 신약성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에게는 그의 사역기간 동안 계속해서 공격받는 약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그가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열 두 제자는 살아생전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분에 의해 직접 선택이 된 제자들이었습니다. 생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히 기억하고 예수님과 먹고 자고 동행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었고요.
그런데 바울은 참 애매했습니다. 일단 그는 초대교회의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광채이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게 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죠.
그런데,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사람들의 공격을 계속 받아온 것이 그의 편지들을 보면 드러나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첫번째 편지인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런 정황이 보다 잘 드러납니다. 제일 첫 문장을 볼 까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어떠세요? 바울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시나요?
이런 바울의 '자기변호'는 다른 편지에도 조금씩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후 1:1)
바울이 보낸 다른 편지들을 보면 시작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독 이 갈라디아서는 감사가 생략되고 바로 질책으로 들어갑니다.
1장 5절까지는 인사말에 가까운 하나님에 대한 기도인데, 이것을 끝맺자마자 (영광의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로 6절부터 질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사실 갈라디아서 전체를 읽어보면 바울이 분노한 이유가 잘 나와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쳤는데,
다른 사람들이 와서 믿음 외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요즘말로 속되게 표현하면 "빡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이런 바울의 분노는 2장까지 계속되다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2:1)
4장에는 '언성을 높인다고' 되어있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 4:20)
이 당시 바울의 서신은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 써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이 되었다는 건 무엇을 말할까요?
(바울 : 잘 쓰고 있지? 지금 쓸 때, 내가 목소리를 높여 큰소리를 내고 있다고 써)
이런 바울의 분노는 5장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 5:12)
그토록 할례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차라리 스스로 베어버리라고 하는 거죠. (뭐를 베어버리라고 하는 걸까요?)
바울은 마지막 6장에 가서는 "직접 펜을 들어 쓰기 시작"합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다음이 큰 글자로 쓴 내용들입니다. (갈 6:12~끝)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렇게 쓰고 갈라디아서를 마칩니다.
다른 서신서를 보면 안부를 전하고, 안부를 묻고, 대필해주는 사람도 인사를 전하는 등의 일반적인 끝맺음이 있은데요.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바울이 한바탕 질책을 쏟아내고 그냥 끝내버리고만 편지입니다.
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분쟁이 언제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현재 학자들은 사도행전 11장의 회의와 관련있다는 주장과 사도행전 15장의 회의와 관련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각자 강점과 약점이 있어 정확하게 결론이 나진 않은 상황이라고 하네요.
어떻게 보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분쟁과 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분노 같은 건 조금은 동떨어진 내용일지 모릅니다.
이미 우리는 믿음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정리된 신학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막연하게 근엄하고 경건하게만 느껴졌던 사도들도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와 비슷한 고뇌와 감정적인 대립을 겪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또 그들을 좀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그토록 격렬하게 싸우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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