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서의

by 강석우

에릭슨(Erikson, E)은 자아정체성을 “~로서의 나 사이의 통합의식”이라고 설명하였다. 누구나 그렇듯 수없이 많은 ‘~로서의 나’를 살고 있다. ‘~로서의 나’가 잘 통합되지 않으면 이중적 존재로 비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나만 해도 ‘교회학교 교사로서의 나’와 ‘학교 교사로서의 나’, 그것도 ‘윤리 교사로서의 나’,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나’가 다르다면 아들 눈에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심각한 고민이 될 때도 많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난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하다. 그저 내 일만 잘 해내면 저절로 전체사회가 조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러나 ‘~로서의 나’는 반드시 사회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로서의 나’라고 하는 정체성 정립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어쩌면 정확한 나의 정체성이 될 수도 있겠다.


‘~로서의 나’는 대부분 선택하는 것이다. 내 자유의지로 최상의 삶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교사로서의 나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이고 내가 선택했던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나도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이고 불가피성이 가미되기는 하지만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실현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내가 본 나는 어떻게 될까. 대부분 실현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이것은 다분히 내 주관의 세계이다. 대체로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도 당연히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둘 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약간의 사회적 도움이 있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아들로서의 나이다. 내가 부모님을 절대 선택한 적이 없다. 아들로서의 나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도 없다. 사회적 도움, 좁게는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 나 같은 경우 장손으로서의 나라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에 내가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강요와 자연스러운 세뇌로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일을 나도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내가 받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도 억지로 안겨 주고 싶어 하지 않으셨기에 하루 이틀 미뤄지다가, 갑자기 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밖에 없으면서 미리 익혀놓지 않은 것들에 대한 후회를 겪었기에 하나하나 물려주어야 하건만.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잇따른 집안의 상사에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장손으로서의 의무와 해내야 하는 책무들이 나를 짓누르고, 해야만 하는 다른 일 들을 젖히고 내가 잘할 수 없는 일들에 매달려 몇 날 며칠을 보내야 하다니. 어머니, 용서하세요. 그리고 조상님들, 용서하세요. 집안 어르신들, 용서하세요. 이 일은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어 엉거주춤한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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