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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mpathizer Apr 15. 2019

따뜻한 학자의 본보기란 이런 것

<아픔이 길이 되려면>

큰 틀에서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질병이라는 주제, 그리고 중간중간 불쑥불쑥 떠오른 개인적인 기억들은 원치 않는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책 읽기를 중단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든 생각은 꼭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것.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질병과 사회의 연관성을 다룬 책이다. 사회가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을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이자 고려대 교수인 김승섭은 한국 사회의 질병을 연구하는 사회역학자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사회역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는 환경이 사람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우리의 몸은 매일 주변 환경과 맞서 싸운다. 날씨가 추울 땐 피부 표면에 혈액이 몰려 체온을 높이고, 밝은 빛에 노출되면 동공이 작아지는 것처럼, 몸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그에 맞춰 변한다. 질병도 그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도 각종 질병의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어떤 조건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병에 걸릴 확률이 달라진다. 전쟁이나 재난에 휘말렸다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높고 독성 화학물질을 규제하지 않는 나라의 공장에서 일하면 난치병에 걸릴 수도 있다. 사회적인 요인은 우리 몸에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 질병의 발생에 있어 유전자만큼이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저자는 우리 몸을 아프게 하는 가장 흔한 원인으로 일터를 꼽는다. 직장은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곳이며 생계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일터는 안전하지 않다. 사람들은 발암물질을 취급하는 공장에서 일하고 휴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직장을 다니며 의사들은 일주일에 60시간 이상을 격무에 시달린다. 여기에 직장내 갑질도 가세한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7명이 갑질을 경험했으며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의 91.5%가 몸이 아팠다. 질병을 얻게 되는 과정은 각기 다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모두 대한민국 전반에 공통으로 깔려 있는 문화와 사회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출처: 파이낸셜 뉴스


하지만 질병의 사각지대는 일터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도 포진해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빈번하게 질병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이 그 중 하나다. 이 책에 나오는 HIV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성애를 처벌하는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HIV유병률이 더 높았다. 스스로의 존재를 숨기고 음지에서 행동하며, 콘돔을 사용하는 경우가 낮고 HIV검사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성소수자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약자를 배려하고 타인의 고통에 예민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정부와 공동체의 역할을 묻는다. 사회적 안전망을 제도로서 제공하는 정부, 그리고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고 슬픔에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 인간의 존엄과 직결되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다. 


책을 읽기 전, 우연히 저자 인터뷰 영상에서 보았던 김승섭 교수는 진중하고 생각에 가득 찬,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이었다. 그러한 학자가 쓴 책은 어떤 책일까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에는 더 궁금해졌다. 이 분은 어떤 마음으로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이렇게 꾸준히도 해온 것일까.


책 말미에 김승섭 교수가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경험들을 계속하고 그것들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간직할 수 있기를 또 길러나갈 수 있기를, 그것이 가능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욕심이 커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회,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용기있게 선택하고 걸어가는 것. 따뜻한 학자의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에 이런 선한 마음을 가진 학자들이 더 많아지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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