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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mpathizer Apr 28. 2019

일자리를 잡은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돈을 벌려면 경제를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돈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영국 시민들


2016년 6월, 브렉시트가 터졌다.내가 영국으로 대학원을 가기 몇 달 전이었다. TV에서는 연일 브렉시트와 관련된 뉴스가 흘러나왔고 영국 시민들의 망연자실한 표정, 혹은 희망에 찬 얼굴들이 엇갈려 지나갔다. 언론은 브렉시트가 영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전 세계에 미칠 영향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은 경제적 여파였다. 브렉시트가 우리나라의 수출과 앞으로의 경제성장에 미칠 영향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맨 처음, 브렉시트는 내게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국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란 걸 알았지만 살갗에 느껴지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 보니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출처: 아시아 경제



브렉시트가 내게 미친 영향 1: 등록금


영국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브렉시트는 내게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었다. 낮아진 환율 덕분이었다. 영국이 EU를 탈퇴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파운드의 가치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1파운드에 1500원 정도의 환율을 보이던 파운드는 계속 떨어지더니 몇 달 뒤에는 1300원대까지 추락했다. 뒤늦게 대학원 입학을 결정했던 나는 브렉시트가 터질 때까지 환전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갑자기 등록금 부담이 확 줄어든 것이다. 낮아진 환율에 운 좋게도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등록금에서 절약할 수 있었다.  


출처: 이투데이


내가 다녔던 대학교의 경우, 과반수가 넘는 학생들이 외국에서 영국으로 바로 건너온 유학생들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기숙사 친구들 중 몇 명은 등록금을 너무 일찍 내버려서 낮은 환율의 혜택을 보지 못했는데 이를 매우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들도 어쨌든 유학 중간중간 환전을 할 일이 있었을 테니 결국 선배 유학생보다는 더 경제적으로는 이득이었을 것이다.  


브렉시트가 내게 미친 영향 2: 취업


낮은 환율은 브렉시트가 나 같은 유학생들에게 준 조그만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짙은 먹구름도 몰고 왔으니… 바로 암울한 취업 전망이었다. 영국 석사 과정은 보통 1년인데 이 때문에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취업 준비도 같이 해야 했다. 많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은 전 세계 문화, 금융의 중심지 런던에서 일자리를 찾길 원했고, 학교에서는 이런 학생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학기 초부터 성대한 커리어 페어를 열었다. 맥킨지, J.P 모건, 골드만 삭스, 모건 스텐리 등 국내외 유수기업들을 초청해 매일 산업별로 각기 다른 커리어 페어가 열렸고, 학생들은 취업정보를 분주하게 찾아다녔다.      


내가 다녔던 대학의 실제 커리어 페어 모습


내가 다녔던 학교는 취업률과 연봉이라면 영국 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석사 과정에도 미래가 창창한 아이비리그 등 세계 최고 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취업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석사과정의 학생들은 퇴사를 하고 온 경우가 많고 나이도 있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한 동기는 직접 대기업 본사를 찾아다니고 구글 직원을 학교로 초대해 강연을 주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생들은 걱정이 가득했는데, 브렉시트의 여파로 영국의 많은 기업들이 채용을 줄이고 외국인에겐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는 얘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LSE는 영국 대학들 중 졸업생 연봉이 높기로 유명하다.


결과만 말하자면 석사 과정이 끝나갈 무렵, 내 주변에서 현지에서 일자리를 잡은 외국인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브렉시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듯했다. 실제로 내 지인은 골드만 삭스 최종면접에서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비자를 스폰서해 줄 수 없어 직접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그 친구는 입사를 포기했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취직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기에 구직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내 옵션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었다. 

 


브렉시트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원 생활을 한 것은 내게 다른 때였으면 불가능했을 많은 경험을 안겨주었다. 난 비교정치를 전공했는데 수업시간에 브렉시트가 언급되지 않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이를 주제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경제에 대한 내 관심은 커져갔다. 


내 전공은 정치학의 세부 전공 중 하나인 비교정치였는데 내가 다닌 학교는 그중에서도 중점 분야를 하나 선택해 관련 수업을 듣고 논문을 써야 했다. 난 정치 경제(Political Economy)를 선택했고 학부 때와는 매우 다른 학문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국가와 시장’이라는 수업에서는 근대 시장경제의 근원을 되짚어 나갔는데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경제 개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있었다.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을 읽으며 사유지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배웠고 케인즈를 읽으며 시대마다 변화하는 경제 기조를 따라갔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군중 심리가 버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한국의 IMF와 일본의 버블경제에 대해 공부하게 된 것도 머나먼 영국에서였다.  


학부 때 전공한 정치와 경제의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알고 나니 경제사를 좀 더 일찍 공부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경제는 내게 큰 재미가 없는 학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경제과목을 들었지만 그땐 경제가 수학처럼 느껴졌다. 매주 여러 형태의 수요 공급 그래프를 그렸고 공식을 외웠지만 별 의미는 없게 느껴졌다. 배운 개념을 실제 사례에 접목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만약 경제사를 먼저 공부하고 경제 이론을 배웠더라면 지금쯤 내 대학 전공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대학원에 다닌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경제 공부를 많이 할 순 없었지만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된 희열은 후에 개인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경제 관련 책을 뒤적거리고 틈틈이 금융에 관한 기초 공부를 시작했다. 최근 내게 꼭 필요한 지식을 알짜배기로 모아놓은 고마운 책 중 하나는 홍춘욱 박사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이다.  



이 책은 ‘돈’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50개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재밌게 설명한다. 저자는 국내 최고의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박사로, 2016년에 조선일보와 FNguide가 ‘가장 신뢰받는 애널리스트’로 선정했다. 학부에서는 사학을, 대학원에서는 경제와 경영을 공부해 다방면의 지식을 두루 섭렵한 지식인이기도 하다.  


저자 약력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는 서양과 동양의 역사를 두루 다루고 있는데 한국의 IMF,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같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부터 시작해 트라팔가 전쟁, 산업혁명, 명나라의 멸망 같은 역사도 등장한다. 웃프게도 난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영국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영국 역사와 경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 예는 ‘영국은 어떻게 인구 폭발을 피할 수 있었을까?’ 챕터이다.  


중국이 아닌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났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날 당시 중국과 영국은 모두 경제규모가 컸고 막강한 생산력을 자랑했다. 인구가 많아 인건비가 낮았던 중국과는 달리 영국 자본가는 일손을 덜어주는 기계를 만들 인센티브가 컸다. 그렇다면 왜 영국은 인구가 많지 않았을까?  


출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유럽에서 재배되던 밀의 생산성이 쌀에 비해 낮았기 때문이다. 당시 밀과 호밀 농사는 땅을 쉽게 약화시켜서 같은 땅에 반복해서 재배할 경우 생산성이 매우 떨어졌다. 또한 수확량의 비율은 많아야 1:4였다. 낟알 4알을 거둘 경우, 다음 농사에 쓸 종자를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빵을 만들 수 있는 건 3알만 남았다. 흉년이 들면 기근이 생기기 쉬운 농사였던 것이다. 반면 벼농사는 같은 땅에서 몇십 년 동안 계속 지을 수 있고 2,3 모작까지 가능했다.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인구 과잉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이 나폴레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가 등장 한다. 

<트라팔가 해전> 출처: 조선일보

프랑스는 인구도 영국보다 훨씬 많았고 해군 육성에 필요한 ‘경제력’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불패의 해군을 육성해서 세계 최고 강대국 프랑스를 이길 수 있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네덜란드 금융 시스템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새 국왕은 네덜란드 출신이 되었다. 바로 오렌지 공 윌리엄 (윌리엄 3세)이었다. 윌리엄 3세는 수만 명의 기술자와 금융 인력을 데려왔다. 즉, 네덜란드 금융 전문가와 금융제도를 영국에 들여온 것이다.  


그렇게 영국에서 ‘네덜란드 금융’이 싹트기 시작했고 국채금리는 10%에서 7%로 떨어졌다. 영국은 저금리 국가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해군과 육군은 이 돈으로 전력을 상승할 수 있었다. 거대한 함대를 만들었고 실제 화약을 사용해 실전처럼 훈련을 했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을 때, 프랑스는 스페인 백성들을 약탈해서 식량을 보충한 반면 영국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게릴라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네덜란드 금융이라는 건 무엇이길래 영국을 부자로 만들었을까?  


다음에 이어지는 챕터는 네덜란드가 어떻게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를 출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이렇게 ‘원인의 원인’을 파악해 역사적 사건을 유기적으로 엮어나가며 역사가 지루하다는 고정 관점을 깨뜨린다.  

왜?라는 질문은 역사 공부에 필수적이다.

책을 읽고 나면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남는다. 50개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경제의 큰 흐름과 반복되는 패턴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초보자들이라도 책에 나오는 경제 개념들을 지금 당장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적용할 수 있다.  


주식에 대한 팁은 덤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금리가 높은 나라는 투자처로 적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조언한다. 국가나 개인의 신용도가 낮을 때 금리는 높아진다. 그리고 금리가 높은 나라, 혹은 기업일수록 불확실성이 높다. 신흥국이 발행한 국채나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이 발행한 회사의 금리가 높은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홍춘욱 박사는 우리에게 자상한 선생님처럼 돈의 역사를 조곤조곤 알려준다. 대학원 시절, 이 책이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을 먼저 읽고 수업시간에 내가 배운 이론과 사례에 접목해봤더라면 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런던의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때에, 영란은행의 역사를 떠올리며 Bank 역 거리를 걸었다면 어땠을까? 영국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떠올리며 런던의 금융센터 카나리 워프를 방문했다면?


등굣길에 자주 지나쳤던 Bank of England 
런던의 금융센터 카나리 워프 


하지만 지금에라도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취업을 한 지금 ‘돈’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돈은 무자비한 주인이지만, 유익한 종이 되기도 한다.”-유태격언


나를 포함한 요즘 많은 20,30 대들의 화두는 재테크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경제를 알아야 하고, 경제를 알기 위해서는 돈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지 궁리하는 사람들,  ‘돈을 보는 눈’을 키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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