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생명체에 깃든 신
- 연약한 존재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것들
1. 영화 <밀정>의 한지민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인 주인공(송강호)이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을 추적하다가, 서서히 그리고 어느 순간 완전히 일본 경찰 정체성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오래전에 봤기에 그 구체적 변화 과정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결정적 순간'으로 인식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의열단원 연계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고문 끝에 거적에 덮인 시신으로 들것인지 수레인지에 실려나가는 광경을 주인공 송강호가 가까이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거적에 가려지지 않은 시신의 일부, 시신의 발을 보고 그 시신이 연계순임을 알게 된다.
나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고 본다. 지배하는 강자의 세계에 속해있던 그가 정확히 그 발을 본 순간 그 세계 밖으로 튕겨져 나간 것은. 무엇이 그를 이동시켰는가. 나는 그 장면을 극 중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인 주인공의 시선으로 보았다. 그때 느껴진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이었다. 만약 그 시신이 의열단 리더(공유)였다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극 중 연계순 역을 맡은 이는 배우 한지민이다. 배우 한지민이었기에, 그런 장면에서 주인공을 흔들어놓은 정동, 그를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킨 마음의 변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고 본다.
왜 그랬을까. 배우 한지민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가냘프고 연약한 체구, 공격성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작고, 여린 생명체가 짓밟히는 상상, 그것이 불러오는 연민은 내 안에 있는 연약한 생명체가 소멸될 때 발생하는 진동에 대한 감각이다. 배우 한지민이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2.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 트레일러에서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
넷플릭스에 배우 정보가 소개되어 있지 않아 배우 이름을 알 수 없다. 트레일러 홍보 영상에서 괴생물체들이 나타나 한 남자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유독 하드 코어 범주의 폭력적 콘텐츠가 많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이 장면을 시리즈를 홍보하는 대표적 장면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괴물의 가학적 폭력성을 강조함으로써, 시청자의 어떤 가학적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런 가학적 폭력의 첫 번째 희생자로 선정된 남자 캐릭터. 그 남자는 완전히 겁에 질려있다가,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결국, 정말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죽는다. 그 역할을 맡은 배우는 몸집이 작고 가냘픈 이였다. 힘없고 연약한 남자가 그렇게 죽게 되는 장면에서 나는 영화 <밀정>의 배우 한지민의 시신이 실려나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두 개의 장면이 겹쳐지면서, 내가 <밀정>에서 느꼈던 무너짐을 다시 느꼈다.
연약한 생명체에 깃든 신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을 보는 자로 하여금 자기 안의 연약함을 자각하고, 그것이 상처받거나, 짓밟히거나, 파괴되는 상상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게 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자기 안에 남아있는 희망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연약한 생명체에 깃든 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을 때,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넷플릭스의 <지옥>에서는 그런 희망이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