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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un 12. 2022

A. 마음에 갇히다

- 내가 만든 감옥

살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여러 가지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상처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다.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에게서 상처를 받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상처를 가장 많이 주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상처는 가족이나 친구, 직장동료들에게서 받게 된다. 

특히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는 어지간해서는 치유가 되질 않는다. 그 이유는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부모라는 이유로 형제자매라는 이유로 상대의 마음을 쉽게 침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늘 하는 말이 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관심이 없으면 잔소리할 이유가 없어’ 등등.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인 경우가 더 많다.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상대의 상태를 살피지 않는다. 옳은 말을 하기 위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는 그렇게 상처를 줘야만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상처만 남는 옳은 말은 옳음은 사라지고 상처만 마음에 남아서 덧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상처를 주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옳음을 위해서는 그런 상처쯤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대방은 '틀림 혹은 잘못됨'과 상처가 남게 되고, 그렇게 상처를 받은 입장에서는 차라리 틀린 말이라면 무시해 버릴 수 있지만 맞는 말이기에 자기 스스로 점점 이것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자괴감만 커져간다. 


그런데 큰 문제는 이런 일이 한 번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로에 둔감해지고 상처를 주고받는데 익숙해져서 상처는 더욱 크고 깊어지고 상처를 주는 사람과 상처를 받는 사람으로 나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가족 간에도 묘한 갑을관계가 형성되며, 가학적인 사람과 피학적인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이런 학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가족이라는 이유로 커다란 폭력이 이해 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각을 하게 된다. 가해하는 사람은 사랑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상처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그런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기 쉽다. 

또 상처받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자기비하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그런 자기에 대한 혐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자학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더욱 그 상처를 키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묘하게도 상처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다. 울고 싶은데 누군가 뺨을 때려주는 비유에서 보듯 상처를 받고 싶어서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과잉 해석하기도 하고, 일부러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어깃장을 놓듯 자학을 해서 상대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 그 분노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만들어나가기도 하며, 그러기위해서 더 큰 상처를 원하기도 한다.


이렇듯 타인에 의한 상처나 나 자신에 의한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한 꺼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품은 채, 혹은 치유가 되었더라도 그 흔적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또, 상처가 사람에 따라서는 깊은 내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통해 성숙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특히 어린 시절의 상처는 깊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상처를 입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에 벽을 세운다. 타인으로부터의 상처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스스로 주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같은 공격으로부터 다시는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벽을 세운다. 그렇게 마음에 부딪치는 상처들에게서 보호받기 위해 벽을 세운다. 이렇게 세운 벽들은 이중성을 갖게 된다. 그렇게 세운 벽들은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사방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성이 되어 보호막이 되기도 하지만, 문제는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는 것이다. 내면의 성은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점점 더 벽은 안쪽으로 두터워지고, 점점 좁아져서 작아진 마음의 감옥 속에서 자신의 내면은 찌그러져 간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마음의 감옥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렇게 감옥에 갇힌 채 나갈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스스로 열쇠를 가지고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러한 상처를 통해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 벽에 문을 만들어 출입하며 상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기르고 상처를 어루만지기도 하며 상처를 보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성안에 또 다른 성을 만들어 숨어있는 또 다른 자신이 있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겹겹의 성을 수십개, 혹은 수백개를 만든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벽을 허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수의 벽에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만드는 것이다. 벽을 허무는 것은 너무 어렵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모두 바꿔야 한다. 이런 과정은 전문적인 수행을 하는 명상가들에게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벽에 문을 만드는 방법이다. 스스로를 보호하되 그 벽 안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벽을 두고 왕래를 하는 과정에서 철옹성 같던 벽이 점점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문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객관적인 상태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보고 감당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의 온갖 치부들 -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기억 - 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명상은 이런 눈과 마음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지만 하루하루 명상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다보면 객관적인 눈과 마음의 힘은 점점 자라나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맺고 산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디쯤에 위치시켜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자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마다 다른, 적당한 거리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오히려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알기 어렵다. 관계 속에 자신의 위치와 거리를 잡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을 그냥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삶 속에서 한번씩 점을 찍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어느 미래에 늙은이가 되었을 때, 삶의 정당성을 고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무엇에 치우치지 않은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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