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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Sep 12. 2022

H. 자비(慈悲)에 대한 오해

- 냉정한 자비

불교에는 자비(慈悲)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럼 자비란 무슨 뜻일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인 자(慈)와 사람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인 비(悲)를 합친 말이다. 다시 말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아가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을 말한다. 사람 대부분은 자비를 관용이나 따뜻한 마음 정도로 해석하고 자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요즘 명상에서도 ‘자비’, 자애’, ‘연민’ 또는 ‘친절’ 등으로 표현하면서 자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먼저 자비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위로는 도(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다소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왜 수행자들은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중생을 구제하려는 것일까?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는가?


여기에는 수행자의 관점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수행을 통해 차가워진, 재처럼 싸늘해진 냉정한 마음에 다시 불씨를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보통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보기 싫은 마음도 봐야 하는데 내 마음속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두렵고 괴로운 일이다. 두려움과 괴로움, 그리고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는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타협해서 적당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기도 하고,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 도사린 중생심이 또 다른 내 마음에 상처를 스스로 입히기도 한다. 현대의 명상과는 달리 불교에서 마음공부의 기본은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자신의 생각 한 자락, 감정 한 톨도 인정하지 않는다. 면도날로 한겹 한겹 저미듯이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부정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 이유는 인간은 틈만 나면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왜 좋지 않은 것인가? 물론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자기부정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틀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 감각까지도 ‘나’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기 위한 존재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내가 나를 속이려 든다. 그렇게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과 욕망을 하나하나 부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감정, 생각, 욕망을 인정해야 하는데 이 과정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괴롭다. 나 자신의 추함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괴롭고 싫은 일이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냉정해진다. 부정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마음을 단박에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수행을 하신 수행자들의 눈은 푸른색 안광이 나오기 때문에 ‘눈 푸른 납자’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냉정해지다 보면 불타다 남은 찬 재처럼 싸늘해진 흔적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인가 하면 냉정해지는 것이 마음공부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의 마음공부는 철저한 자기부정을 뛰어넘어 무아(無我)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무아는 부정하는 존재조차 남아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무아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비이다. 그러기 위해서 차가워진 마음의 재에 다시 불씨를 틔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다시 인간의 마음을 만들어서 그 힘을 가지고 마지막 관문을 뚫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타일여(自他一如)의 마음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기에 그들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라는 관점이다. 또한 내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타인들도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부처님의 은혜를 입어서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난 고마움을 부처가 아닌 타인에게 이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한 마음을 일으켜 선한 과보를 갖도록 도와준다.

일반적인 사람들을 중생이라고 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중생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욕망을 사용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은 타인의 욕망을 부정하고 탈취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살아간다. 자비는 이런 중생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기대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자신의 중생심을 알고 중생의 중생심을 모두 알고 난 후에 내는 것이 자비이다. 중생인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즐거움으로 가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같이 기뻐할 뿐 그들이 나중에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혹은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배반하더라도 오로지 중생심으로만 볼 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질 뿐이다. 마음이 식어버린 재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로봇 같은 마음일 수 있다. 자비는 모든 중생의 모든 욕망과 번뇌를 느끼면서도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마음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마음은 있지만 틀은 사라진 상태에서 쓰는 마음이 진정한 자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나 동정이 감정의 영역이라면 자비는 감정을 넘어선 영역이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자비를 쓸 자격이 생긴다. 그것은 감정에 대응하는 이성의 영역도 아니다. 감정도 품고 이성도 품는 마음의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다. 끝없이 수행하고 수행을 통해 마음을 공부해서 나아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정한 자비는 냉정함을 넘어 냉혹해 보이기도 한다. 상대의 욕망에 맞춰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그런 욕망을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할 때도 있다. 그때 상대방이 괴로워하더라도 그 괴로움 뒤에 오는 진정한 안락을 위해서 냉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마약을 끊을 때 금단현상이 심하다고 한다. 마약을 끊고 마약의 후유증에서 돌아오는 기간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고통에서 구한다는 이유로 다시 마약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마약을 끊는 고통이 크더라도 마약을 끊도록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 괴로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는 냉혹하다. 자비는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더 큰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작은 고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작은 고통을 준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 이상의 고통을 같이 느끼는 작업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또 다른 전제조건이 숨어있다. 자비를 베푸는 자의 마음이 충분히 단단한 상태이거나 마음의 그릇이 커서 흔적이 남질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수행을 해서 마음을 성장시킨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친구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같이 동조해서 느끼다가 자신도 같은 고통스러운 마음에 빠져본 경험은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친구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려다가 같이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경험 같은 걸 말한다. 10대나 20대에 이런 일들을 한두 번 겪고 나면 마음에 벽을 치고 거리를 두는 마음 가지게 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결국 자비란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처절한 냉정함을 기반으로 일어나는 따뜻한 마음이며, 이 자비라는 마음을 토대로 수행자는 다시 '무아(無我)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자비란 단어는 '사랑, 공감, 연민, 친절'과 같은 마음과는 다른 의미일 수 밖에 없고, 진정한 자비는 자비를 통해 나도 깨어나고 중생도 깨어나는 나와 남이 하나되는 마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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