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제주 오름을 닮은 북아일랜드의 풍경
쉬는 날이 같은 코워커들과 함께 몬 산맥으로 트레킹을 떠났다. 몬 산맥은 북아일랜드 카운티다운 지방의 대표적인 자연 유산이자 트레킹 코스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마을 어디서든 고개를 들면 늠름한 자태의 몬 산맥이 보였다. 수레를 끌고 배달을 하는 와중에도, 크리스틴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할 때도 내 시선의 끝은 늘 완곡한 능선에 머물렀다. 평원과 층고가 낮은 건물뿐인 이곳에서 시야를 가로막는 건 오직 구름뿐이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떨어졌지만 약속을 취소할 핑계는 되지 못했다. 궂은 날씨가 일상인 이곳에선 겨우 이 정도 비로 트레킹을 포기하지 않는다. 출발 전, 길 위에 지도를 펼친 소피아가 짧은 브리핑을 시작했다. 내 눈엔 그저 다 똑같은 산이며 벌판인데 그녀는 실선으로 표시된 도로와 등고선, 지명을 척척 읽어내며 어떻게 루트를 짜면 좋을지 의견을 내놓았다. 혼자서도 곧잘 산행에 나서는 마그다 역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우스파더에게 빌려 온 산행 지도를 내밀며 추천 코스를 제시했다. 논의 끝에 뉴캐슬에서 12킬로미터쯤 떨어진 슬리브나먼 로드에서 길을 시작하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내가 아는 어느 섬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마치 제주의 오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했다. 나지막한 언덕이 위아래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저 멀리까지 펼쳐졌다. 푸른 잎사귀로 뒤덮인 한국의 울창한 산과 달리 이곳의 산은 어딘지 쓸쓸했다. 깎아지른 듯한 능선과 숲, 계곡 대신 얕고 넓은 벌판이 주를 이뤘다. 군락을 이루는 침엽수를 제외하면 이끼 색의 풀과 갈대가 이불처럼 산을 덮고 있었다. 벌판은 양들의 거대한 식탁이기도 했다. 주인이 있는 양은 털에 울긋불긋한 색이 묻어 있는데 이곳의 양들은 몸이 깨끗했다.
화강암으로 쌓은 돌담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역시 제주의 풍경과 어슴푸레 겹쳤다. 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의 자연은 여러모로 제주를 떠올리게 했다. 섬이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거센 바람과 급변하는 날씨, 완만한 산, 돌담, 초원 위의 말, 짙고 푸른 바다가 결코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다시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국이었다면 곧장 우산을 펴거나 실내로 몸을 피했겠지만 이곳에선 사정이 달랐다. 모두 당연하다는 듯 배낭에서 방수점퍼를 꺼내 껴입기 바빴다. 생전 입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아웃도어 의상이 이곳에서는 일상복이나 다름없다니. 몬그랜지에 도착하자마자 나선 생필품 쇼핑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물건이 튼튼한 방수 점퍼였음을 떠올렸다.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비를 대하는 태도마저 이토록 달라진다.
호기심 넘치는 소녀 소피아는 잘 닦인 길을 뻔히 놔두고서 자꾸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언덕에 풀어둔 양 떼를 쫓아서,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 폭포를 향해서, 그 순간 마음이 꽂힌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그다는 여동생 같은 소피아를 마냥 귀여워하며 ‘저걸 어째’ 하는 눈빛으로 별말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반면 이대로 가다간 길을 잃는 게 아니냐며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 이는 나와 마이라였다. 둘 다 싫은 소리는 곧 죽어도 못 하는 성격이라 딱히 성토도 못 한 채 쫓아갈 뿐이었다. 결국에는 따라잡기를 포기한 채 우리 두 사람의 속도대로 느직느직 길을 걸었다.
화산 분화구처럼 생긴 저수지 아래로 내려간 소피아가 껑충 뛰며 우리를 손짓했다. 한눈에 봐도 가파른 경사였다. 오렌지 알맹이처럼 터지는 그녀의 에너지를 도무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희뿌연 안개가 저수지 뒤편 산허리를 댕강 잘라냈다. 잠깐 사이에 눈앞의 산이 사라졌다. 자연이 부리는 찰나의 마법을 배경으로 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더욱 맑게 웃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