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 신입사원입니다
첫 출근날 새벽 5시도 채 되지 않아서 출근을 마쳤던 나는
오후 일과를 마치는 시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선배들이 무언가 하려고 행동을 취할 때마다 벌떡 일어서서 쭈뼛거렸던 것 말고는.
그럴 때마다 선배들은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하게 돼있으니깐 오늘은 옆에서 구경만 해.' 하면서
다소 오버하는 듯한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오후 4시 반 정도 되었을까?
열심히 일을 하던 선배들이 부리나케 일을 마무리하고는 갑자기 행동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선배님, 신임 소위도 왔는데 운동 안 가십니까?'
'가야지.'
'운동복이랑 운동화 챙겨 왔어?'
사실 수원에 오기 전 정환이 형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부서 사람들 죄다 풋살 하려고 군대 온 사람들 같아.
너도 풋살화나 축구화 있으면 챙겨 오는 게 좋을 거야.'
풋살화는 따로 없었지만, 축구화라도 챙겨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서 축구화는 챙겨 왔습니다.'
'그럼 숙소 가서 옷 갈아 입고 4시 40분까지 OO앞 풋살장으로 와.'
'네, 알겠습니다.'
숙소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 입고, 다시 OO앞 풋살장까지 가려면
10분이란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내 맞선임이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도 말이다.
'아니다. 그냥 내가 태워 줄게, 같이 가자.'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나 보다.
옷을 갈아입고 풋살장에 도착했더니 일부 사람들은 몸을 풀고 있었고,
하나 둘 풋살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누군가에게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필승 경례를 했다.
군복을 입었다면 계급 식별이 가능해서 누가 부사관이고, 누가 선배 장교인지 알았겠지만
수원에서의 첫 출근인 나로서는 제각각의 유니폼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분간해낼 요량이 없었다.
대충 눈치껏 선배들을 따라 행동했다.
'오. 신임 소위인가 보네? 풋살 좀 해?'
그가 누군진 몰라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최상급 자임을.
'잘은 못하지만 그래도 좋아는 합니다!'
'오, 씨. 잘하나 보네. 이렇게 얘기할 정도면.
난 골대 앞에만 있을 거니깐 어시스트 기대할게.'
풋살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모여 결국 밀어내기 방식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밀어내기란 말 그대로 이긴 팀은 계속해서 경기를 진행하고,
진 팀은 경기장 밖에서 자기 순번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경기를 관전해야 하는 방식이다.
나는 사회에서 미드필더, 또는 윙어로 경기를 했었지만
이곳에서는 실력을 증명하기 전까지 골키퍼 또는 수비수를 해야만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 팀에는 전담 골키퍼가 있어서 나는 수비수를 맡게 되었다.
'저기 검은색 유니폼 입은 애 보이지? 쟤 옛날에 축구선수였거든. 쟤만 막으면 돼.'
그 소리를 듣고 나니 수비수를 맡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사라졌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모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풋살장은 정규 축구장의 1/4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풋살에서는 공수전환이 빠르게 이뤄지고, 실제 축구보다 빠른 전개가 이뤄진다.
역시나 선출이었던 상대는 멋진 기량을 뽐내며 하나 둘 돌파를 시작했고
어느새 나와의 거리가 불과 2m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오늘 잘해서 부서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겠다는 포부와 동시에
돌파를 당하면 한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상대는 왼쪽으로 갈 것처럼 움직임을 취했고,
나는 그가 왼쪽으로 페인팅을 주고 오른쪽으로 나를 돌파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서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척하다가 반대편으로 수비하며 그의 돌파를 저지할 계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왼쪽으로 갈 것처럼 페인팅을 주고 오른쪽으로 터치를 이어갔다.
'됐다!'
이걸로 모두에게 제대로 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내 움직임을 보고는 다시금 왼쪽으로 터치를 이어가면서
나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는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아 뭐해!! 하.. 쟤 뭐하냐..'
지는 상대편 골대에서 내려오지도 않으면서
상대의 돌파를 저지하려다 실수한 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괜찮아?'
그래도 나를 챙겨주는 건 우리 부서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에
묘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나였다.
엉덩이는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그것도 만난 지 10분도 안 된 사람이 나를 못마땅해하는 게 아팠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그에게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고 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아팠다.
이곳은 군대이자 직장이었다.
역시 선출은 선출이었다.
우리는 상대에게 내리 4골을 내어 주며, 크게 지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살짝 살폈는데 여전히 나를 못마땅해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계급이 어떻게 되는지, 어느 부서에 있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걸 보아하니
이대로 경기가 끝나게 된다면
앞으로의 군생활이 그리 밝지 못할 것 같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