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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푼 Dec 31. 2022

장교로, 아니 만약 공군 장교로 오지 않았더라면-3

현역시절의 기록

다음으로 '팀워크'에 대한 부분을 적어보고자 한다.

내 3년 군 생활 중 가장 부담되었던 일은 재난통제 '현장지휘관'이었다.

특히, 내가 근무하는 곳은 작전지휘부로 

연습·훈련 시 모든 지휘관·참모가 정위치하는 곳이기도 하고,

단일대대가 아닌 '항공작전과/기지작전과/암호체계반/정보체계반/정보처' 등이 근무하고 있는 

속칭 '다국적 기업'이었다. 이 모든 부서를 통솔하고 적재적소에 투입하는 일을

'말단 소위'인 내가 맡게 되었다.

처음 재난통제 상황 때는 허둥대기 십상이었고, 현장지휘관인 내가 그러고 있으니

우리 재난통제팀은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었다.

나와 타 부서 사람들 간 유대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재난통제팀을 재구성하고

팀원들의 이름과 계급을 모두 외워버렸다.

또한, 주기적인 교육과 회의를 진행해서 모든 팀원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고,

정기적인 연습과 사전 훈련을 통해서 다음 재난통제를 완벽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비로소 '팀워크'를 발휘하는 팀이 되었다.

이후에도 타 부서와 협업을 하는 일들이 아주 많았는데

이 '현장지휘관' 경험을 바탕으로 잘 해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전'과 '전문성' 부분이다.

얼마 전 '전투태세훈련' 때 일이다.

우리 부서에서 내 위로 장교 3명이 전역 전 휴가 중에 있었고,

들어온 지 불과 4개월밖에 안 된 소위 두 명과 나, 

총 3명만 있는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처장님이 '진급 교육'을 가시게 되면서 

내가 처장대행으로 '정보참모' 역할을 맡게 되었다.

조·석간 브리핑을 하고, 보고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장교 정원이 6명이던 부서가 졸지에 3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처장님도 안 계신다니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내게 주어진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 멋있게 해내야겠다는 도전의식이 생겼다.

그래서 주말에도, 밤에도, 사무실에 있는 온갖 참고자료들을 정독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만큼 더 공부해야 하고, 부족한 만큼 더 채워야 할 따름이었다.

그 결과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춘 상태로 전투지휘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여러 지휘관·참모분들에게 칭찬도 들었다.

특히, 단장님께서 모든 지휘관·참모가 있는 자리에서

일개 중위였던 내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OO이, 브리핑 잘한다.'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러면서 훈련이 끝나는 날 마지막 상황보고 때는

'상 하나 주고 싶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난 3년의 고생이 인정받는 순간이었고,

이 '전투태세훈련' 기간이 내 3년 군 생활 중 가장 힘들었지만

최고로 기분 좋았던 순간이었다.

훈련이 끝나고도 한동안 일부 지휘관·참모분들이 지나가다 마주치면

'고생했다.', '잘하더라.' 등 격려와 칭찬의 말씀을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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