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화이트라 불리는 수정액이 필요해 다이소에 갔다. 문구 코너에는 수십 가지 제품이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어 무엇 하나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화이트, 화이트'라고 중얼거리며 수정액을 찾았지만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중얼거림을 멈추고 익숙한 모양을 떠올리며 찾기로 했다. 머릿속에 '달팽이처럼 생긴 투명 플라스틱'을 떠올리며 다시 진열된 곳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어딘가로 향해 저절로 멈추는가 싶더니 눈앞에 딱 머릿속에 떠올린 '달팽이처럼 생긴 투명 플라스틱'이보였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화이트를 구매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포장지를 벗겨 화이트를 꺼냈고,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대고 스윽 그었다. 어? 뭐?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다시 그었다. 역시 기대했던 하얀색은 묻어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투명한 뭔가가 묻어 나오긴 했다. 요즘은 화이트가 투명하게 나오는가? 불량인가?라고 생각하며 만져봤다가 깜짝 놀랐다. 쩍 달라붙는 끈끈이의 성질이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포장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깜짝 놀랐다. 다이소에서 이 제품을 살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크고 또렷한 글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풀 테이프'라고 크게 적혀 있었는데 왜 이걸 포장지를 뜯을 때까지도 보지 못했던 걸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건의 범인으로 망상활성계를 지목했다.
저렇게 크게 적혀 있는데도 보지 못함. 여전히 화이트처럼 생겼음
망상활성계가 뭐길래 풀테이프를 화이트로 착각하게 만들었을까? 망상활성계는 한마디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신경네트워크다. 후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 정보는 망상활성계를 통과해야 뇌로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망상활성계는 수많은 정보 중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린다. 그러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뇌는 초당 4000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하는데 이것을 의식에서 모두 처리하려면 800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뇌에 과부하가 걸려 금세 망가질지 모른다. 그래서 망상활성계가 그중 2000비트만 의식에 남기고 나머지는 용량 무제한인 무의식으로 보낸다고 한다. 망상활성계가 버리지 않고 취하는 정보는 내가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거나 원하는 것 그리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다.
망상활성계의 작동에 가장 흔한 공감 사례는 대략 이렇다. 나이키 운동화가 너무 갖고 싶은 고등학생이 있다. 틈만 나면 나이키 운동화를 검색해 보고 머릿속에 떠 올린다. 이 학생이 거리를 다니게 되면 주위에 온통 나이키 운동화만 보이게 된다. 나이키 운동화가 갖고 싶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이키 운동화만 보이게 된다. 옆 사람이 '나이스'라고 하는데 '나이키'라고 하는 줄 알고 눈을 번쩍 뜨며 쳐다본다. 망상활성계가 나이키 운동화를 사고 싶은 마음과 생각을 반영해 나이키 운동화와 관련된 정보만 걸러내 의식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나이키에 빠져 있는 이 고등학생의 망상활성계는 나이키 외 다른 운동화의 정보는 뇌로 보내지 않기 때문에 나이키 운동화만 보이게 되고 나이키의 나 자만 들려도 즉시 반응하게 된다.
다이소에서 내가 원했던 건 달팽이처럼 생긴 투명한 플라스틱의 화이트였다. 망상활성계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캐치해 달팽이처럼 생기지 않은 건 제외하고, 불투명한 것도 제외하고 플라스틱이 아닌 것까지 제외 한 정보만 뇌로 전달했다. 모양이 아닌 글자 또한 망상활성계에 의해 걸러지는 정보였다. 그래서 나는 풀 테이프라고 커다랗게 적혀있는 걸 보고도 보지 못했으며, 달팽이처럼 생긴 투명 플라스틱의 모양만 보고 화이트라고 착각했다.
망상활성계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활발히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게 사소한지 중요한지는 문제 되지 않는다. 원하는 게 얼마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것인가가 중요하다. 달팽이처럼 생긴 투명 플라스틱 모양의 화이트를 사겠다는 건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였다. 그래서 망상활성계가 제대로 작동했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가 정해지면 망상활성계가 거기에 초점을 맞춘 정보만 내게 가져다준다. 이런 신박한 기능은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이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내게로 몰려오는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이든 구매과정을 거친다. 돈을 지불하든, 열정을 지불하든, 인내를 지불하든 뭐든 지불하면 얻게 되는 것 즉, 구매되는 게 있다.
구매를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원하는 게 있어야 한다. 원하는 게 정해지면 최고의 구매를 위한 정보를 탐색하게 된다. 이 정보탐색의 과정에서 망상활성계가 능력을 발휘해 원하는 걸 얻도록 돕는다. 가령, 자동차 구매를 위해 고관여 상태에서의 정보 탐색 과정을 마친 구매자는 매장의 직원보다 아는 게 더 많아지고 준 전문가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원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 원하는 걸 얻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원하는 마음이 가득한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면 즉시 실행하게 될 것이다. 뇌는 망상활성계가 정보로 보여주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행동을 취할 것을 몸에 명령한다는 말도 있다.
정보 탐색 과정에서 그 정보와 관련된 새로운 신경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정보 탐색을 하면 할수록 그 신경 네트워크가 강화된다. 다시 말해, 목표와 관련된 정보를 학습하며 목표에 관련된 많은 지식을 쌓게 된다. 초점이 잡힌 정보를 집중적으로 흡수하게 되어 정보 탐색 과정 자체에서 이미 목표에 몰입하게 되고 목표에 다다르게 해 줄 지식들을 축적해 간다. 지식이 많이 쌓인 상태에서 계속 목표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떠 오르게 되고 적절한 아이디어가 떠 오르면 자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행동을 통해 원하는 걸 얻는다.
망상활성계로 원하는 걸 얻는 건 '목표 설정 – 정보 탐색 – 아이디어 생성 – 자동 행동'의 시스템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내게 필요한 정보만 흡수해 주는 망상활성계가 없으면 내가 원하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실속 있는 정보가 다른 수많은 산만한 정보들과 섞여 들어와 알짜배기 정보를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일수록망상활성계가 더 실한 정보를 모아준다.
망상활성계가 정보를 취사선택 하는 게 어떻게 원하는 걸 얻게 하는 힘이 되는 걸까? 화주에 비유하면 그 느낌이 닿을 것 같다. 화주는 해를 모아 불을 일으키는 수정이다. 쉽게 말해 돋보기다. 햇빛을 한 점으로 모아 종이를 태우는 돋보기를 두고 옛사람들은 해를 모아 불을 일으키는 수정이라고 멋스럽게 표현했다.
태울 것은 목표다. 그리고 화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망상활성계다. 햇빛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망상활성계를 통해 초점 잡힌 정보만 집중적으로 흡수하는 것이며, 불을 일으키는 건 초점 잡힌 정보로 원하는 결과를 이루는 것이다. 목표에 초점이 맞춰진 정보가 한 점으로 모일 때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거다.
생각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 망성활성계가 모으는 정보도 달라진다. 정보가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그러니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모든 결과가 달라진다.
사람은 그가 온종일 생각하는 대로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람은 생각하는 그대로 존재한다. -잠언-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 -얼 나이팅게일-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하루종일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에머슨-
이 명언들은 하나같이 망상활성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에 따라 망상활성계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달라지고 그 정보들에 의해 내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이소 풀테이프 구매 사건의 경험으로 망상활성계의 힘을 실감했다. 이게 이미 누구나 가진 능력이란 게 매력적이다. 여태껏 망성활성계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었지만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걸 의도적으로 활용해 보면 어떨까 싶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가진 것으로 원하는 걸 얻어가며 더 나아질 수 있다면 활용해야 한다.
'해를 모아 불을 일으키는 이야기'라는 매거진에서는 망상활성계를 연구하면서 경험한 그리고 경험할 이야기를 기록해 보려고 한다. 원하는 걸 얻어가는 이야기, 더 나아짐을 얻는 이야기 등 해를 모아 불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많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