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는 비가 오면 흙 밖으로 나온다.
비를 좋아해 외출하는 게 아니라
탈출하는 거다.
흙속에 빗물이 차면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지렁이에게 비 오는 날의 탈출은
사는 일이 아니라 죽는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비가 오면 막걸리를 생각하듯
비가 오면 지렁이를 생각하는 도요새 때문이다.
도요새는 지렁이를 먹고 산다.
비 오는 날의 도요새는 탈출한 지렁이를
잡아먹는다.
비 오는 날의 지렁이는
그 자체가 아픔이고 슬픔이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아도
지렁이는 아프고 슬프다.
도요새는 비가 오지 않아도
지렁이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만 오면
지렁이가 나온다는 걸 알아챈 도요새는
귀도 없는 지렁이가 어찌 비 오는 걸 알까
곰곰이 생각하며 지켜봤다.
한 참을 지켜본 후 마침내 알았다.
지렁이는 빗방울이 땅을 때리는 진동으로
비가 내림을 안다는 걸.
그래서 도요새는 시도한다.
부리로 땅을 두드려 비가 오는 듯
진동을 내어 본다.
오. 지렁이가 기어 나온다.
유영만 교수의 '생각사전'이란 책에서는
도요새가 부리로 땅을 두드려
비가 오는 것처럼 지렁이를 속이는 걸
관찰에 의한 통찰이라고 한다.
새대가리 치고는 훌륭한 통찰이다.
도요새는 통찰력 하나로
식사가 편해졌다.
부리로 땅을 똑똑 노크하면
주문한 음식처럼 지렁이가
먹히러 기어 나오니까.
새대가리로도
통찰력을 발휘하여 편하게 먹고사는데
내대가.. 아니 내 머리로도 못할 것 없겠지.
안되면 새대가리처럼 이라도 생각해야지.
하지만, 내 머리는
새대가리로는 생각 못할
다른 생각도 할 줄 안다.
지렁이들은 평생
도요새의 속임수를 알아 채지 못한다.
속임수에 넘어간 지렁이는
도요새의 곱창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무리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가 없다.
지렁이는 미끼가 되어 죽기도 하지만,
미끼에 걸려 죽기도 하는구나.
바늘에 찔리고 물고기에게 먹히고.
비가 오면 도요새의 먹이가 되고.
도요새에게 속아서도 죽고.
비가 그치면 말라죽고.
사는 데 죽을 일이 너무 많다.
지렁이에게 처음으로
고마운 감정을 느껴본다.
지렁이 같은 삶에 기대어
내 삶은 귀하다는 걸 알아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