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동아리와 회사의 그 중간. 그리고 다시.
2018년 1월 2일. 조금은 설렌 마음으로 구로디지털단지에 위치한 한 스타트업에 첫 출근을 했다. 그리고 설렘을 가진 나를 반기던 건 미처 알지 못했던 열악한 근무환경이었다. 직원은 새로 채용하였으나, 그 사람을 위한 충분한 근무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모습에 나는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 없이 인터넷 전화기만 달랑 놓여있는 책상. 그리고 컴퓨터가 없어, 회사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노트북만이 내게 주어졌을 뿐이었다. 이상을 꿈꿨던 내게 열악한 현실은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무것도 없는 책상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1차 면접 때 봤던 사수가 일정표를 내게 건넸었다. 건네받은 일정표에는 '적응기'라는 명목으로 여러 시간들이 채워져 있었다. 4일간의 짧은 일정이긴 했지만...
회사 대표를 통해 스타트업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태도와 능력. 회사의 미션과 비전을 들었고, 각 팀 사람들과 잠깐의 티타임을 가지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수습기간 3개월 동안 내가 달성해야 하는 KPI를 확인하며 짧은 적응기를 끝마쳤다. 4일의 짧은 시간이 지나자 무서운 속도로 일을 하나 둘 인수인계받기 시작했다. CS 응대를 시작으로 아웃바운드 영업, 인바운드 영업, TM 등이 내게 넘겨졌다. 그리고 이 일들을 수행하면서 나는 스타트업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보단 부정적인 모습을 겪게 되었다.
스타트업에서 올린 채용공고를 보면 절대 빠지지 않는 말들이 있다. '기존 기업과는 다른 수평적인 조직문화',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 이 두 가지 말은 스타트업 채용공고에선 절대 빠지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다니며 느낀 건. 호칭이 자유로울 뿐 보수적인 면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출퇴근 시간 중 자유로운 건 퇴근 시간뿐이었다.
'내일부터 야근시킬 거야. 나는 집에 일찍 들어가는 모습 더 이상 못 봐.'
스타트업에 들어온 지 2주 차가 되던 어느 때였다. 위의 말을 실제로 듣지는 않았다. 다만, 사수로 부터 그리고 당시 회사에서 사용하던 업무 도구에서 저 말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내게 '칼퇴'라는 단어는 사라져 버렸다. 수습기간 동안 160만 원 밖에 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게 야근은 일상이 되었다. 더구나 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어느 누구도 늦게 출근하는 법 없이 정시 출근은 당연한 얘기였다. 새삼 '석식 지원'이라는 말이 채용공고에 존재했던 이유를 깨달았던 순간이었고,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이라는 말은 채용공고에 버젓이 적혀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맞지 않는 직무로 인한 스트레스. 서울에서 혼자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월급.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으로 일 시키려는 회사의 태도. 내가 다니던 곳은 이 삼박자가 절묘하게 어울려진 곳이었고, 이러한 모습은 흔히 알고 있는 일반 중소기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다닌 스타트업의 부정적인 모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너한테 첫 임무를 줄게. 우선 제안서 한 번 새로 만들어봐.'
고객을 회사의 수익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제안서. 사업을 시작할 때 고객의 니즈를 자극할 수 있는 '제안서'는 반드시 필요하고, 업력이 쌓여갈수록 변해가는 시장의 흐름과 고객의 니즈에 맞춰 꾸준히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 것이 제안서이다. 하지만, 내가 들어간 곳은 여전히 초창기 제안서를 가지고 영업을 하고 있었고, 이미 달라져버린 회사와 시장의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업을 담당하는 팀장도 제안서의 리뉴얼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제안서를 고치기보다는 직접 만나 말로써 영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제 막 입사한 지 일주일이 갓 지난 내가 제안서 리뉴얼을 담당할 만큼 기본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있는 곳이라고 느껴졌다. (이런 곳이 어떻게 다양한 곳에서 투자를 유치하는지는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고 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물씬 피어나는 곳이었다. 고객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회사의 계약서를 보며 사수에게 들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게, 우리 계약서이긴 한데... 법적 효력이 있지는 않아요."
고객과 약속을 하고, 계약사항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 그걸 제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계약서를 가지고 영업을 영위한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 때문에 계약을 맺은 고객 중, 회사와 약속한 사항을 지키지 않는 고객들도 여럿 있었고, 그때마다 회사는 철저히 '을'의 입장에서 끌려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우리 목표는 월 매출 큰 거 한 장(1억 원)이야."
회의 때마다 직원들에게 강조했던 목표였다. 하지만, 기본 중의 기본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곳에서 과연 그들이 말하는 큰 거 한 장이 달성될 수 있을지 조차가 의문이었다. 업무를 담당하면서 부정적인 모습을 알아가던 때. 무엇보다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건 그들이 가진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돈이 들지 않는 마케팅. 마케팅 비용으로 대신 저희에게 이용권만 주시면 됩니다.'
처음 비즈니스 모델을 들을 때에는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미 블로그엔 여러 업체의 광고글이 난무하던 때. 고객들의 비용을 아낄 수 있는 매력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을 배우고 회사가 수익을 창출하는 과정을 직접 겪으면서 '빛 좋은 개살구' 심하게 말해서는 내가 하는 말이 '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간략하게 내가 다녔던 곳의 비즈니스 모델은 고객과 계약을 맺게 되면 현금 대신 금액에 상응하는 '이용권'을 가져오는 형태였다. 그리고 고객에게 받은 이용권을 회사의 앱을 통해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였다. 처음에는 일반 소비자도 저렴하게 매장을 이용할 수 있고, 고객의 입장에서도 마케팅이 실패하더라도 그만큼 '무료'로 제공하는 이용권이 나가지 않기 때문에 '리스크'를 줄여주는 좋은 모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계약 맺은 기간 동안 회사는 해당 이용권을 모두 소진시키는 것이 목표였고, 때문에 계약기간 만료가 다가올수록 매장 이용권에 엄청난 할인을 적용하여 일반 소비자에게 판해하였다. 이러한 할인을 통해 서비스를 이용한 일반 소비자의 재방문율은 높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게다가 매장을 이용하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만큼, 이용권을 이용한 일반 소비자로 인해 정상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일반 소비자를 놓치게 되는 문제도 존재했다. 때문에 회사와 계약을 맺은 고객들 중 상당수가 이런 불만을 꾸준히 회사에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런 문제로 재계약을 하는 고객보다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종료하는 고객들 수가 많았었다. 즉, 겉으로는 고객을 위하는 듯한 비즈니스 모델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콘텐츠'만이 추가되었을 뿐. 블로그를 통해 마케팅을 하는 다른 기업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쿠팡과 같은 소셜커머스를 꿈꾸었지만, 실상은 단순 SNS 홍보업체 일 뿐이었다.』
열악한 근무환경. 석식 지원 말고는 준비된 게 없던 복지. 퇴근 시간만이 자유로웠던 근무시간. 그리고 업무시간에 비해 낮은 급여. 공감할 수 없는 비즈니스 모델 등. 부정적인 모습만을 내게 보여줬던 그곳은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3개월의 짧은 수습기간이 끝날 때쯤. 회사에서는 나를 두고 슬슬 정직원 전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대표도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에 만족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내 몸에 맞지 않는 옷고 입느라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있던 때였다. 때문에 달콤한 말로 나를 회사에 두고 싶어 하는 대표의 말은 내 귀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단지 31이라는 숫자만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솔직히, 일을 하면서 보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거듭된 대표의 설득. 계속되는 설득에 나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대표는 더 이상 나를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3개월. 짧은 사회생활을 끝으로 나는 다시 취준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잠시 암흑 속에 갇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