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휘갈겼다.
'밤새 죽음을 생각하며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눈물과 극단적인 감정으로 뒤범벅된 메모 쪼가리들을 보며 느껴지는 양가감정.
그 양가감정과 끄적임 속에서 전날도 마무리하지 못한 생을 오늘도 이어 붙이고 있는 나를 새벽녘엔 틀림없이 아이가 찾는다. 다시 퇴행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는 잠꼬대를 했다.
성당의 종소리가 들릴 때 잠깐 새벽을 감상할 뿐 창문을 열어둘 수는 없었다.
방충망이 없는 원룸이어서 조심했건만 어느새 아이를 공격했다.
나는 무모한 엄마였다.
이러한 변수를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입국한 것이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가게에서 얼음을 얻어 냉찜질로 열을 내려주는 것이 내가 한 전부다.
일상은 단조로웠다.
나는 여행자가 아니었다.
신용카드는 줄지어 거래정지가 되어있었고, 환전한 돈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 두 끼의 식사는 최저가에 맞췄다.
그나마 핑크 성당 건너편의 쌀국수를 아이가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한국의 물가보다 많이 저렴했지만 표시된 금액은 베트남 동이 아닌 한화처럼 느껴져 가격표를 보면 환율을 계산하지 못하고 자동으로 움츠러들었다.
늦게 일어나는 아이의 시간표에 맞추어 시내로 나갈 때는 '그랩'을 이용했다.
다낭의 4월 체감 기온은 체감 35도가 넘어갔다.
해 질 녘에는 걸을만했지만 정오의 시간에 아이를 걸린다는 것은 가혹행위였기에
예상 밖의 교통비가 추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퍼 코 하노이'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우리는 콩 카페 옆 해피 커피로 향했다.
밥 값은 한국보다 월등히 저렴하지만 커피숍은 큰 차이가 없는 듯 느껴졌다.
한국의 저가 커피숍의 메뉴 가격이 내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더러는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왼쪽 카페를 가기도 했지만 나는 오른쪽 카페 '해피 커피'가 타깃이었기에 가끔은 길에서 우격다짐으로 아이를 끌고 한국 사람들의 성지인 콩 카페를 지나치곤 했다.
해피 커피는 2년 전 심각하게 다낭으로 건너가려고 살피던, 그 당시에는 비어있던 가게였다.
한국에서의 자영업은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에겐 지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있다.
생활물가가 낮고 한국인에게, 장애인에게 너그러운 이 도시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도 아이였다.
또 하나는 2년 전 가이드로 만난, 한국에서 7년간 노동자로 일하고 돌아와 다낭 시내에 터를 잡은 '호아'부부와 함께 협업할 수 있는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들어와 보니 상황은 달라져있었다. 그 사이 '호아'의 친구는 다른 업종에 투자를 한 상황이었고, '호아'의 아내는 쌍둥이를 출산한 지 오십일이 지나있었다. 생후 1년 동안은 육아에 전념할 계획이었고, 나에게 빌려주기로 한, 방도 이미 세를 내어준 상황이었다.
'다른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일자리를 찾아서 체류비를 감당하자는 생각이, 지금 마주한 현실을 파악하고 든 생각이었다.
계획표를 짠 듯 규칙적인 일과가 이어졌다.
오후 5시 50분에는 반드시. 카페를 나와 아이가 좋아하는 반미 샌드위치가게로 향한다.
가끔은 멍키 바나나를 주기도 하고, 처음 보는 음료를 덤으로 주기도 하는 그 반미 가게를 나와 우리는 1.8km를 40분이 걸리도록 걸어, 땀범벅을 만든 육체를 3월 2일 새벽 3시 '호아'의 아내가 안내해 준 원룸에서 다시 말끔하게 만든다.
아이가 반미 2/3를 먹는 동안, 가면을 하나 얹은 필체로 나는 오전의 기록을 옮겨 적었다.
나를 살게 할 규칙으로 만들었다기보다 한 가지에 꽂히면 쭉 그렇게 해야 하는 아이 덕분이었다.
"이것은 도피인가, 도전인가..."
책 속으로, 기록 속으로 번갈아 들어가며 질문하는 나는.
도전?
아니, 도피 중이었다.
B 카드사의 상담원에 의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