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문장과 숫자들이 가득한 채권 양도 통지서가 도착했다.
규정에 맞는 채권만 선별하여 양도했다는, 연체 중이던 채권의 일부가 양도되었음을 알리는 통지서였다.
공문서 속의 나.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 몇 줄에 담긴 나의 시간을 돌아봤다.
이력서 몇 줄에 나를 다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공문서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양도 채권 명세
차주명 :****
여덟 줄의 칸칸이 채워진 숫자들만이 나를 설명한다.
애쓰며 버티던 시간에 대한 정보는 없는 숫자들.
그리고 나에 대한 수식어가 하나 더 늘어났다.
채무자.
가압류를 걸어두었던 신용보증재단의 부채는 가압류를 포함하여 새출발기금으로 넘어갔다.
은행 채권팀의 요청 전화에 따라 나는 순서를 지켜 내키지 않는 전화로 문의를 했다.
신용보증재단에서는 일체의 권리가 모두 넘어갔으니 재단 측에서 가압류를 풀 권한도 없음을 알렸다.
거래가 이미 종료된 건으로 분류된다고 했다.
새출발기금 측에서는 가압류가 된 부동산은 채무를 상환하는 기간까지 보존한다고 했다.
예상했듯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채권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 염치가 없었다.
그동안 나에게 최선의 배려를 해 주었기에.
지난해 이미 만기가 도래하는 즈음 상환능력이 없음을 안 담당자는 어떻게든 1년 연장을 끌어냈다.
그때 내가 갖고 있던 은행에 대한 차가운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사람이 하는 일은 변수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나는 이미 신용이 추락한 상태이고, 담보물이 안전하기는 해도 은행에서는 부실채권으로 분류해서 강제 집행을 통해서라도 채권을 회수할 예정이다.
담당자는 스스로 '오지라퍼'라고 말하며 나를 최대한 구제해 줄 방법을 회사에 건의해 봤지만 통과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기에 나는 실망도 없었지만 채권담당자는 "송구스럽게도..."라고 표현했고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나도 느껴졌다.
채권 담당자.
그 차가운 단어 속의 그는 알까?
이 긴 여정에서 가장 나를 많이 울린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유일한 공감자라고 생각하는,
내가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희망이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어 가끔은 견딜 만하게 이끌어준 그에게 감사한다.
이십 칠 년 전부터 나는 잘 해내야 했다.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잘 해내고 싶었다.
나는 네 아이의 엄마니까.
아프지 않은 척, 힘들지 않은 척, 그 연기생활은 결국 13년 만에 이렇게 막을 내려야 하나보다.
나에게 지금 남은 건 새출발기금에서 내용증명으로 보낸 채무 양도 통지서 몇 장과 가압류되어 공매의 수순을 기다리는 거주지와 '새출발이 가능할까?' 하는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