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도 잔망

망해도 잔망

by 강민정



친구는 내 인생을 지켜보면서 한 줄 평했다.


“넌 참……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같아.”


그 말을 듣고 웃었지만 마음속에서 뭔가 꼬였다. 내가 망한 것처럼 보인다는 건가? 뭐, 내 인생이 대단히 망한 것까진 아니다. 그저 기대가 좌절되는 순간들, 한 세계의 일부가 무너지는 느낌을 자주 느낄 뿐이다. 어릴 때 전학을 많이 다녀 집단에서 배척당하는 경험을 자주 하고, 전세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항상 건강 이슈가 많고, 가정의 불화도 겪었으며, 30대 중반에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비정규직으로 소액을 벌며 불안해하는 상황. 이것들은 내가 바란 방향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성향부터 생각 많고 예민하게 타고난 터라 스트레스 레벨과 불안도가 높다. - 왜 어떤 기억과 말은 소화되지 않고 내내 남는 걸까? 흡수가 안 된 채 토해지는 건 뭐지? - 항상 세상과 불화하는 느낌을 받다 보니 망했다는 감각으로 쉽게 연결되는 것이다. 현재를 누리기보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 걱정에 발목 잡히고 그 잔상을 오래 들여다본다.



한컴 타자 연습을 할 때가 생각난다. 단어 하나하나 분절되는 장면. 2000년대 초반 초등학생 때 40명 정도가 컴퓨터실에 모여 한컴 타자를 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선생님은 교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게임이라 불리지만 사실 재미없는 훈련, 노동에 가까웠다. 아이들이 알 필요도 없는 어려운 한자어들 - 비애, 음각 - 이 비처럼 마구 쏟아지면 시간 내에 빠르게 쳐서 없애야 했다. 아니, 알아두면 좋았을까? 끝없는 폭우처럼 내리던 시어들. 화면 중간엔 남은 시간이 표시되었다. 언제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던 메밀꽃 필 무렵, 서시. 여전히 뜻도 잘 모르면서 쳐내기만 했다.



여러 단어 중 '불행'이 내 것같이 느껴지던 날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의 슬픔에 지나치게 이입하는 편이었다. 내 마음도 소화 안 되는 통에 타인 또는 엄마의 감정까지 전염이 되어 속이 부대꼈다. 과부하가 걸리는 기분은 컵 떡볶이로도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8살 때는 일기장에 ‘나는 불행하다.’라고 적었다. 그 단어 뜻을 확실히 알았던가? 아마 남의 불행과 나의 것을 구분 못 했을 수도. 당시 나는 거리를 지날 때마다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엄마, 저 사람을 왜 안 도와줘?” 거리에 앉아 있는 아저씨 아줌마, 노인들은 멍한 눈빛을 하고 계셨다. 연민에 빠진 나는 그 앞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엄마를 불러세우고 우리 거를 나누자고 눈으로 말했다. 엄마는 어떨 땐 동전이나 지폐를 내밀었고, 어떨 땐 지나쳤다. 너무 그렇게 다 줄 필요 없다면서. 그게 이해가 안 되었다. 사람들이 내 속에 남아 오래 지워지지 않았고 어른이 될수록 점점 세상과 불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더 무거워지지 않게 잔망을 떨어보기 시작했다. 긴장되는 출근길에 뜬금없이 선녀를 청해보고, 급 쌍꺼풀 수술을 했다가도 풀어버리기. 아몬드에서 인생을 발견하는가 하면 생일 날짜를 바꿔보기. 소화가 안 될 때면 글을 써보고, 훌라춤도 춰보고, 튀어나온 무릎을 만져보기. 주변에서 관찰 대상을 발견하면 순수한 호기심으로 다가가 작은 실험을 해본다. 이 책은 그 결과로 기록한 잔망 보고서이자 생존기이다. 고유의 이야기들 속엔 2030 청년들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고 보면 ‘잔망’ 단어에는 뜻이 3가지나 있다.


1) 얄밉도록 맹랑한 것. 2) 약하고 가냘픈 것. 3) 쇠잔하여 다 없어짐. -


내 식대로 정의해보는 잔망이란 세 가지를 합친 것이다. 약하고 쇠잔해도 맹랑한 힘. 같은 현상을 다르게 생각해 보거나, 내 안의 다른 자아를 발견하거나, 자신을 놀려보는 짓이기도 하다. 망에서 잔망으로 가는 길은 좁고 세밀하지만 가끔 윤곽을 드러낸다. 아무리 우울해도 가끔 밝은 척을 하다 보면 조금 햇살이 들기도 한다. 바람 한 점에도, 남편의 장난 한 마디에도, 커피 한 잔에도 30년 묵은 원망이 갑자기 나아질 수도 있다.



누군가 질문할 수 있겠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억지 텐션이 아닌 ‘나’를 인정하고 긍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중충하고 에너지 없는 자아도, 꾸며내서 더 나아진 자아도 모두 내 일부라고 느낀다. 여러 성격을 오가는 게 힘들거나 버겁게 느껴지진 않는다. 더 여유로운 버전의 나를 부르고 그로부터 배워가며,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써보려 했다. 작은 위기들을 분절하고 경쾌하게 넘나들면서. 이젠 심지어 음식도 잘게 쪼개 먹는다. 기록할 땐 ‘불행’을 쓰는 대신 억울함, 부끄러움, 박탈감, 외로움 등으로 쪼갠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문장을 작은 단위로 끊어 읽는, 직독 직해로 배웠던 것처럼. 타자 연습하듯이 맥락을 또박또박. 이는 나에게, 세상에 대화를 거는 소화의 방식이다.



물론 잔망이고 뭐고 통하지 않는 것들도 많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래 남아있는 것. 곱슬거리는 털, 침묵 속 사무실, 망한 첫사랑, 전단지 알바, 암담한 진로, 그리고 이름들…… 거친 파도가 쓸어가도 해변에 남아있는 조개껍질처럼, 가만히 가라앉고 떠오르는 감정들을 들여다본다. 그것을 글로 쓰면서 살살 풀어본다. 그러다 타인과 세상으로도 손을 뻗어 내밀게 될 시기를 기다린다. 각자의 망한 것 같은 순간에도 남은 힘을 쥐어짜 낼 수 있길 바라본다. 그게 바로 잔망력, 잔망 떠는 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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