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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공부를 위해 잡기장을 장만하다

by 김환희

옛이야기 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 그때그때의 단상, 글감, 독후감 따위를 적을 잡기장 한 권을 브런치에 마련했다. 이런 잡기장을 매거진(?)의 범주에 넣어도 될는지 모르겠다. 나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또는 하루걸러 일기를 썼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가끔이나마 일기를 썼다. 내가 일기를 쓰는 습관을 접은 것은 결혼하고 나서이다. 십여 년간 쓴 일기가 수십 권은 되는데, 그 모든 일기를 들고 미국에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두고 갔다가는 가족들이 볼까 두려워 망설임 끝에 지하실에 내려가서 그 모든 일기를 불태워 버렸다. 내 사춘기와 청춘의 모든 고민과 비밀과 아픔과 바람이 빼곡하게 적힌 일기장이 한순간에 불타는 것을 본 이후 오랫동안 일기를 다시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나는 속마음을 날 것으로 기록하는 그런 일기는 쓰지 못할 것 같다.


이 잡기장은 아마도 내면 일기라기 보다는 메모장이 될 듯싶다. 옛이야기를 공부하면서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글을 쓰다 보면, 주제와 연관성은 있지만, 글의 구조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좋은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다. 또는 새로운 공부 주제가 떠오르거나 글감을 만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어떤 상념에 잠겨서 샛길로 빠지기도 한다. 이제는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러한 생각들을 시간이 지난 후 다시금 떠올리는 일이 쉽지 않다. 다소 늦은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착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두고 싶다.


내가 존경하는 미술사가 강우방 선생은 ⟨학문 일기⟩라는 것을 거의 매일 쓰신다.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http://www.kangwoobang.or.kr) 누리집에 들어가면 누구나 강우방 선생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올해 팔순을 맞은 강우방 선생의 ⟨학문 일기⟩에 담긴, 한 위대한 영혼의 절망과 외로움과 바람은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매일매일 나에게는 번개가 번득이고 벼락이 치는 나날이지만, 항상 강의 끝나고 나면 허탈해집니다. 항상 그런 것처럼 16년 동안 오간 사람들 많았지만, 평생 함께 가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새로 시작합니다. 그처럼 매일매일 기적이 일어나지만 그걸 모르므로 하나둘 사람들이 왔다 간 사라집니다. 왠지 슬퍼지는 날입니다. 사람들을 새로이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어느 때는 너무 멀리 나아갔고 너무 깊이 천착했나 싶습니다.”


“다만 10년만 건강히 살면, 못다 한 저서 10권 더 낼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다. 매일 하늘에 간절히 빌고 있다. 아무도 그런 혁명적인 저서를 내지 못할 것이므로…. 하늘은 분명히 나를 도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평생 그래 왔다. 이제 매년 저서를 한 권씩 낼 자신이 있다. 이 기적의 생명을 내게 베푼 까닭이 있을 것이다.”


강우방 선생이 지닌 강렬한 에너지, 자기 신념, 열정, 사명감이 내게는 부족하다. 선생처럼 자신의 절망과 바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용기도 없다. 내가 옛이야기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는, 공부가 내게 큰 즐거움을 주고, 공부하는 동안에는 현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공부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비교문학자의 길에서 절망감과 외로움을 느낀 순간 역시 적지 않다. 그럴 때면 남들이 걸어본 적이 없는 숲속을 홀로 걸으면서 자신의 발자국으로 길을 새롭게 내고 계신 강우방 선생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문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공부하게 이끌어주신, 나의 멘토 이청준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그 밤 산길 행이 어찌 당신 혼자뿐이냐. 네가 가고 있는 산 이웃에도 다른 산들이 있고, 그곳에도 저 혼자 두렵고 어두운 제 산길을 가는 외로운 독행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은 모두 깨어진 영혼들이다.” (이청준, 〈밤 산길의 독행자(獨行者)들〉,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 2005, 문이당)




강우방 선생이 쓰신 책 세 권 소개합니다. ⟪한국미술의 탄생⟫(2007, 솔) ⟪수월관음의 탄생⟫(2013, 글항아리)⟪민화⟫(2018, 다빈치)

강우방 선생이 최근에 쓴 글입니다. 〈강우방의 미술 세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http://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710)

잡기장의 표지로 정한 패턴은 윌리암 모리스가 그린 것입니다. 강우방 선생의 이론을 빌리자면, 영기문의 한 변형인 듯싶습니다. 출처는 위키미디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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