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상하는 아그네테의 삶
⟨아그네테와 남자 인어⟩ 이야기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아그네테의 삶이 지닌 비극성 때문이다. 티엘레가 산문으로 옮긴 이야기와 오늘날의 민요 가수들이 전승하는 노랫말에는 아그네테의 내면세계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독자나 청중은 아그네테의 심정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다. 나는 아그네테가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과거의 가족과 사회로 돌아간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아그네테는 새로운 삶을 꿈꾸며 낯선 세계에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과거로 퇴행하였기 때문이다.
남자 시인들은 바다에서의 삶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삶이었을 것으로 상상하였고, 린다 테일러는 그 삶이 육지에서의 삶과 다르지 않았을 거로 생각하였다. 내 생각에는 아그네테의 바닷속 삶이, 우리네 삶과 마찬가지로, 즐거움과 괴로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삶이었을 듯싶다. 만약 그 결혼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삶이었다면, 아그네테는 육지에 오자마자 남편이 부여한 그 모든 금기를 그렇게 빨리 위반했을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 결혼이 후회와 고통의 연속이었다면, 아그네테가 7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교회 종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 같지 않다. 교회 종소리는 제의의 속성상 매년 똑같이 울렸을 것이다.
우리는 ⟨아그네테와 인어⟩ 이야기를 크게 두 가지 층위, 사회 현실의 층위와 심층 심리의 층위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아그네테 유형의 여성은 가부장제와 기독교 도덕주의가 팽배한 19세기 덴마크 사회의 현실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도 아그네테와 유사한 여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회문화적인 특수성을 제거하고 아그네테의 삶이 지닌 보편성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가난 또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자유와 풍요가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한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에는 자신감과 능력도 부족하고, 사회 현실도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설고 멋진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꿈꾸던 삶의 비전을 보여주면서 청혼한다. 여성은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은 채 주어진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성급하게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풍요로운 삶에 만족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감수성과 라이프 스타일을 지닌 남편과 사는 일이 힘겹게 느껴진다. 어쩌면 남편이 아버지 못지않게 가부장제 가치관과 권위 의식으로 아내를 숨 막히게 했을 수도 있고, 일곱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었을 수도 있다. 자기 삶에는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 여성은 부모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서 남편과 자식에게 영원한 결별을 선언한다.
이러한 아그네테의 삶이 지닌 비극성은 사회문화적 요인 못지않게 심리적 요인에 기인한다. 분석심리학의 시각에서 아그네테의 내면세계에 접근해 그녀의 삶이 지닌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인어 남편’은 현실 속의 남자가 아니라 여성의 심층 심리에 자리 잡은 남성적 내적 인격인 ‘아니무스’로 해석할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보통 옛이야기 속의 동물 아내를 ‘남자의 여성성’인 아니마(anima)로, 동물 신랑을 ‘여자의 남성성’인 아니무스(animus)로 해석한다. 또한 바다나 호수는 무의식의 세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본다. 아그네테가 바다 또는 호수에서 온 남자 인어를 따라서 물의 세계로 간 것은 무의식에서 출현한 아니무스의 힘에 이끌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아그네테가 교회 종소리를 듣고 지상으로 귀환한 것은 오랜 세월 아니무스에 사로잡혀 있다가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 아그네테는 아니무스와 완전히 단절하고 지배 집단의 의식에 순응하는 예전 삶을 선택했다. 이러한 결단은 온전한 자기실현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기에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아그네테는 아무리 힘겹더라도 아니무스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조화와 융합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했어야 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속성으로 인해 삶이 힘들어지더라도, 그것을 부정하고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더 나은 삶을 도모하기 어렵다.
비를레 그룹이 전승한 민요를 보면, 아그네테의 어머니는 돌아온 딸에게 인어가 결혼할 때 순결의 대가로 무엇을 주었는지 묻는다.[1] 아그네테는 인어가 장미와 백합이 장식된 다섯 개의 금반지, 붉은 금팔찌, 금 죔쇠가 달린 신발, 슬플 때 연주할 수 있는 금 하프를 주었다고 대답한다. 인어가 아그네테에게 준 물건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 금은 세속적인 부를 초월한 상징성을 지닌 물질이다. 금은 “태양과 관련을 가지는데, 이것은 새로운 삶, 즉 자기 갱신, 정신의 새로운 발전”을 나타내며, “의식적인 자아와는 구별되는 진정한 자기를 상징하거나, 정신 속에 있는 어떤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2] 특히 아그네테가 황금 하프를 받았다는 것은 자기의 내면세계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고통을 승화시킬 수 있는 수단,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소통의 도구를 얻은 것이다. 아니무스를 의식화하는 과정에는 빛과 어둠이 모두 놓여 있는데, 아그네테는 어둠 만을 보고 빛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또한, 아그네테가 현재의 가족을 버리고 과거의 가족을 선택한 것은 자기 미래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아그네테와 인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현실 속의 자식이라기보다는 아그네테의 미래와 가능성을 상징하는 ‘내면의 아이’로 해석할 수 있다.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는 어린이의 상징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3]
어린이는 자기의 적합한 상징으로, 내적인 미래의 전체성을 재생할 수 있고, 동시에 고유한 개인의 발달되지 않은 면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린이는 한 부분의 순수함과 경외심을 의미하고, 지나가버린 개인적인 어린 시절의 부분으로서뿐만 아니라, 미래의 개인의 가능성으로서 먼 과거로부터 아직 우리 안에 살고 있는 경험들을 암시한다. 그렇게 보면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 방법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그네테가 아이들을 버린 것은 온전한 자기를 실현할 가능성을 자기 손으로 차단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서양의 옛이야기 가운데는, 아그네테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무척 많다. 그 대표적인 옛이야기 중의 하나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손 없는 색시⟩ 유형의 이야기들이다. 친정과 시댁에서 모두 버림받은 ‘손 없는 색시’는 절망의 나락에서 아이와 함께 사는 상생의 길을 모색함으로써 아이와 자기를 모두 구원한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쓰기로 하고, 덴마크의 아그네테와 함께 한 여행은 아쉬운 대로 여기에서 마무리 짓기로 한다.
✽ 표지 그림의 출처는 영문판 위키백과. Sjökungens drottning (1911) by John Bauer, published in Bland tomtar och troll to illustrate Helena Nybloms retelling of the ballad. 본문 그림의 출처는
https://archive.org/details/agnetaandthelakekinghelenanyblom
[1] https://lyricstranslate.com/en/agnete-og-havmanden-agnete-and-merman.html
[2] 에릭 에크로이드, 김병준 옮김, ⟪심층심리학적 꿈 상징 사전⟫, 한국심리치료연구소 1997, 138.
[3]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민담의 심리학적 해석⟫, 한국융연구원, 2018,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