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외국 여행 중에 눈에 익숙하지 않은 건축물들을 만납니다. 그중에서도 그 나라의 대표 문화유산인 궁전과 종교 건축물을 접했을 때 가장 큰 감탄과 경이로움을 보내게 되는데요. 그것은 궁전과 종교 건축물이 한 나라의 모든 능력이 응집되고 권력자의 힘이 최대한 발휘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늘 봐오던 우리나라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기에 우리는 감동하고 놀라움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중국 명·청대의 궁궐인 베이징의 자금성을 처음 마주한 순간은 잘 잊히지 않습니다. 거대한 규모에 위압당해 위축되었다고나 할까요. 묘한 감정에 휩싸여 우리의 경복궁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경복궁을 작고 초라한 궁궐로 비하하기까지 했지요. 베르사유 궁과 같은 서양의 궁전들과는 달리 자금성이 우리의 궁과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기에 더욱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경복궁은 작고 초라한 궁궐일까요? 우리나라 대표 궁궐인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 실제로 작고 초라한가를 객관적 시각으로 먼저 따져보겠습니다.
서울 경복궁(景福宮)의 모습입니다. 경복궁 전경을 가장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장소는 바로! 길 건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정원이지요~^^
주황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자금성(紫禁城)입니다.사진 맨 앞에 위치한 천안문을 자금성의 정문으로 흔히들 알고있지만 베이징 내성(內城)의 남문입니다.천안문 안쪽에 태묘와 사직이 있지요
자금성과 닮은 듯 다른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해 규모가 현격히 작아 보입니다. 아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훼손되고 철거되었다가 40% 정도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어 더욱 그리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결코 작은 궁궐이 아닙니다. 자금성에 비해 작을 뿐 예상외로 매우 큰 궁궐입니다.
예로부터 천제(天帝)가 살고 있는 천궁에는 1만 칸이 있다고 하는데, 황제는 천자(天子)이기에 1만 칸을 넘지 못하고 9,999칸까지 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천자의 성인 자금성을 9,999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금성은 모두 8,707칸입니다. 놀랍게도 경복궁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1867년(고종 5년) 중건 당시 7,225칸에 이르러 자금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 칸 수가 아닌 전체 면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자금성의 면적은 약 72만m²(가로 753m*세로 961m)입니다. 경복궁은 약 44만m²(가로 550m*세로 800m)로 자금성의 61% 규모입니다. 중국 땅이 우리보다 40배 큰 것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일본 교토의 황궁도 약 11만m²(가로 250m*세로 450m)로 경복궁의 ¼ 수준에 불과합니다.
경복궁(북궐도형, 1907)과 자금성(1908)의 도면도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조선에는 경복궁 외에도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지금의 덕수궁)까지 도성 안에 모두 5개의 궁궐이 있습니다. 이 면적을 다 합하면 자금성의 두 배에 달합니다. 도성 안에 궁궐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가히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서울은 궁궐의 도시입니다.
경복궁을 과소평가하게 하는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옛 우리나라의 제도와 예법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경복궁 역시 자금성을 본따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졌습니다.경복궁은 1395년, 자금성은 명나라 3대 영락제(재위 1402~1424)에 의해 1420년에 완공되었으니까요. 경복궁이 25년 앞섭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불탔고 270여 년 간 폐허가 된 채로 내버려졌습니다. 그리고 고종(재위 1863~1907) 대에 이르러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1867년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들은 고대 중국 주나라(B.C 1046 ~ B.C 256) 왕실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 각국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周禮)>의 규범에 따라 궁궐을 지었습니다. 자금성은 황제의 궁궐이 있는 도성을 건설할 때 지켜야 하는 규범인 전조후시(前朝後市, 궁궐을 중심으로 앞에는 관청을 뒤에는 시장을 둠), 좌묘우사(左廟右社, 왼쪽에 왕실 조상의 사당인 태묘를 오른쪽에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단을 둠)의 원칙과 궁궐 조성 시 전조후침(前朝後寢, 궁궐 앞쪽에 정치공간을 뒤쪽에 임금과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을 둠), 삼문삼조(三門三朝, 궁궐을 3개의 독립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 사이에 문을 두어 연결함)의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이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생각했을 뿐 얽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성을 건설할 때 경복궁을 한성 한가운데가 아닌 백악 산자락에 기대어 지었고 그에 따라 뒤에 시장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경복궁과 자금성은 누가 누구를 본따 베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닮은 듯 또 전혀 닮지 않은 것이 두 궁궐이니까요.
그렇다면 실제에 비해 자금성이 경복궁보다 훨씬 커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자금성(紫禁城)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한번 볼까요? ‘자(紫)’는 천제가 살고 있는 북쪽의 별자리인 자미원(紫薇垣)을 의미하는 것으로 천제의 아들인 천자가 살고 있는 황궁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금(禁)’은 황제가 기거하는 곳인 만큼 황제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서양인들은 자금성을 ‘The Forbidden City(금지된 도시)’라 불렀습니다. 왕과 그 자손, 온 백성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경복궁과는 시작부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중국의 왕조들은 주변국들과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관계를 지속해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변국들에게 자금성의 이름이 갖는 의미처럼 중국의 거대함, 위대함,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금성의 모든 공간은 이러한 목적에 맞게 건설되었습니다.
우선 자금성은 모든 구조물의 배치가 처음부터 끝까지 좌우 대칭에 가깝습니다. 막힘없이 일직선으로 쭉 이어져 있으니 더 크고 넓어 보입니다. 반면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시작해 일직선을 달리던 축선이 중궁전인 교태전에서 끝나버립니다. 궁궐의 중간쯤에서 끝난 좌우 대칭 구도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교태전 뒤편으로 비정형과 불규칙의 공간이 채워집니다. 실제로 교태전까지 쉽게 진행되던 경복궁 답사가 이후로는 약간 혼돈(?)의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입니다. 1867년 중건되었지만 6.25전쟁중 포탄 맞아 불탔고,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을 2010년 전통방식으로 다시 복원해 오늘에 이릅니다
또 하나는 자금성의 높은 성벽을 들 수 있습니다. 평균 높이는 10m, 두께는 7.5m입니다. 그래서 자금성 밖에서는 결코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금지된 공간입니다. 보통 관광객들이 자금성 여행을 시작하는 천안문(天安門)은 그 높이가 33.7m로, 이는 아파트 12층 높이에 달하니 시작부터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천안문을 지나 단문(單門), 오문(午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매표를 하게 됩니다. 천안문을 자금성의 정문으로 흔히들 알고 있습니다만, 천안문이 아닌 오문이 자금성의 정문이기 때문이지요.
오문은 높이가 무려 38m에 달하고 벽의 두께는 36m이며 좌우 양쪽으로 누각이 달려 있어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웅장합니다. 자금성 안으로 들어가서도 수시로 우리는 높은 담장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후비(后妃)들의 거처인 서육궁과 동육궁 구역에서는 높은 담장에 가로막혀 마치 미로에 갇힌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궁궐 안에서도 바깥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붉게 칠해진 거대한 담장과 바닥, 그리고 하늘만이 보일 뿐이니 마치 자금성이 유일한 세상인 듯 느껴집니다. 이처럼 높은 성벽은 공간의 크기를 실제보다 훨씬 커 보이게 하는 착시를 불러일으킵니다.
다음 글에서 자금성 곳곳에 숨겨져 있는 황제의 위엄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을 찾아내 경복궁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겠습니다. 함께 가실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