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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May 31. 2023

나는 한 마리 좀 벌레

혼자라 좋은, 시골 인문학여행 - 함양편 2

https://brunch.co.kr/@storybarista/46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함양 남계서원으로 가기 전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을 들러서 가기로 계획합니다. 돈암서원 역시 2019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중 한 곳입니다.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과 노론계의 쟁쟁한 제자들을 길러낸 김장생(1548~1631)을 추모하기 위해 1634년에 세워졌지요.


넓기는 한데 일반적인 서원들과는 다른 낯선 건물 배치 때문에 조금 산만하고 휑한 느낌이 듭니다. 1880년(고종 17) 홍수가 나 물이 차는 바람에 1.5km 떨어진 곳에 있던 원래의 돈암서원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비가 흩뿌리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강당에 유생 복장을 한 학교 선생님들이 모처럼 학생이 되어 성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생들이 스승과 공부하던 강당, 응도당(凝道堂)의 규모가 놀랍습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매우 웅장한 건물로 모든 서원 건물을 통틀어 최대 규모입니다. 지붕 양 옆 풍판 위에는 눈썹지붕이 달려 마치 날개를 단 듯 독특한데 우리 얼굴의 눈썹 역할처럼 눈, 비, 햇빛을 차단합니다.


응도당에 대한 놀라움은 거대한 크기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처마의 엄청난 무게를 받치기 위해서 기둥머리에 공포를 짜올려 힘을 분산시키는데, 이 공포와 화반(지붕의 하중을 창방에 전달하는 역할)의 목조각이 무척이나 정교하고 아답습니다. 응도당의 마지막 볼거리는 강당 마루에 걸려있는 1660년(현종 1)에 사액받은 ‘돈암서원(遯巖書院)’ 현판이지요. 글씨체가 무척 힘찹니다. 스승을 위해 응도당을 건립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썼습니다. 응도당은 보물로 지정된 멋진 건축물입니다.      


논산 돈암서원의 백미, 강당 응도당입니다.  모든 서원 건물 중 최대 규모이지요.

                        

응도당의 측면에서 바라본 눈썹지붕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지붕 아래 공포와 화반의 목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예술적입니다. '응도당'과 마루 안쪽의  '돈암서원' 현판은 둘 다 송시열의 글씨입니다. 힘이 넘치지요?^^


돈암서원을 떠나 차로 2시간이 채 되지 않아 서원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에 도착합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고 손에 잡힐 듯 옹기종기 정겨운 마을이 펼쳐집니다. 혼자 잘났다고 솟아올라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 하나 없이 뻥 뚫린 덕분에 눈이 시원하고 편안해집니다.


개천 주변에 풍요로운 논밭과 마을이 펼쳐지고 산은 위엄 있게 이를 호위하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 한가운데에 남계서원이 있습니다. 잘난 척 꾸밈도 없고 그저 자연 속에서 단출하고 소박합니다. 하지만  호들갑스럽지 않게 사람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과시하지 않는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을 만난 듯 마음이 열리고 얼굴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서원 강당의 뒤태를 담아봅니다. 안개 자욱한 산, 남계천, 너른 들판, 서원의 강당, 붉은 꽃 피운 배롱나무가 차례로 눈으로 들어오는군요.   


남계서원에는 돈암서원의 응도당 같은 웅장한 강당도 없고 서원 건축의 백미라 칭송받는 병산서원의 만대루 같은 누각도 없습니다. 웬만한 서원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보물급 건물도 하나 없습니다. 그렇다고 도산서원처럼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대스타(이황)를 모신 서원도 아닙니다. 남계서원의 유생들이 묵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겨우 각 2칸짜리 집입니다. 그마저 한 칸은 마루, 나머지 한 칸만이 온돌방입니다. 도산서원의 기숙사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 집인 것과 비교가 됩니다. 하지만 이토록 소박하고 간결한 남계서원은 그 자체가 그저 보물 같습니다. 이 단아한 서원은 조선 성종 때의 학자 일두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모시고 제사 지내기 위해 1552년(명종 7)에 세워지고 1566년(명종 21)에 사액을 받았습니다.          


남계서원 현판이 두 개로 나뉘어 걸려 있는 것이 독특합니다. 현판조차도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건물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입니다. 지금의 사립대학교 정도로 면 되겠습니다.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되었는데 최초의 서원은 중국에서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1542)입니다.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건의해 서적 등의 물자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 바로 남계서원입니다. 서원이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는다는 것은 국가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으로 명성뿐 아니라 면세와 면역 등의 실질적인 이득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지난 글에서도 언급된, ‘국가가 인정한 학자’ 정여창에 대해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의 본관은 하동입니다. 그의 증조 대부터 처가인 함양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함양사람이 되었지요. 젊었을 때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쓰러져 들판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돌아왔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너희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셔서 내가 의지할 건 오직 너뿐인데, 지금 네가 이러니 나는 누구를 의지하겠느냐?”며 꾸짖었답니다. 이에 정신이 번쩍 든 정여창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지요.      


23세 때 드디어 운명의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스승인 김종직이었지요.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1454~1504)과 교우하며 동문수학합니다. 본격적인 학문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김종직, 김굉필, 김일손 등과의 만남이 불러올 인생의 어마어마한 폭풍을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호를 일두(一蠹)로 정합니다. 중국 송나라의 정이천이 “다른 사람의 은택을 입고 살면서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낼 뿐 다른 사람에게 은택을 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 벌레(一蠹)에 불과하다.”라는 말에서 ‘일두’를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자신을 한 마리 좀 벌레라 칭하는 겸손함이라니요! 그의 겸손함과 사람됨이 남계서원과 닮았습니다. 집은 집주인을 닮기 마련이니까요.   

  

정여창은 1490년(성종 21) 41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 정계로 진출합니다.  성종은 정여창을 무척 아꼈는데, 어느 날 “어머니와의 약속이라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자신이 내린 술을 사양한 정여창을 괘씸히 여기기는커녕, “효자의 술은 내가 마셔주지.”라며 흑기사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하지만 그는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의 총애는 받지 못합니다. 연산군이 동궁이던 시절, 스승이 되었지만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의 스승이 무척 성가셨던 연산군은 결국 스승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앞의 글에서 언급한 무오사화입니다.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고 유학적인 이상사회를 꿈꿨던 실천 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후대에 간행된 『일두유집(一蠹遺集)』만이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 6년 만에 숨고, 두 달에 걸쳐 어렵게 시신을 운구해 고향인 함양에서 장례를 치렀지요. 하지만 그 해 일어난 갑자사화(1504)로 인해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무덤은 다시 파헤쳐졌습니다. 그의 저서 대부분은 불태워졌고 조광조를 비롯 많은 제자를 두었던 김굉필에 비해 제자가 적었던 정여창 학문에 대해서는 후대에 전하는 바가 지 않습니다. 돈암서원의 응도당과 같은 웅장하고 기세등등한 건물이 남계서원에 없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중종반정(1506)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후 명예가 회복된 정여창은,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 5현(賢)으로 추앙받으며 문묘에 배향됩니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 서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김종직의 또 다른 제자인 김일손(1464~1498)을 배향하는 청계서원입니다. 1907년(순조 1)에 세워졌습니다.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음을 지난 글에서 언급하였지요.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는 두 서원을 바라보며 무오사화로 유배 가고 유배지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한 정여창은 김일손을 원망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남계서원과 나란히 또 하나의 서원이 있습니다.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이지요. 김일손이 머물며 공부하던 청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제 정여창이 태어난 개평마을로 향합니다. 그가 태어났고 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여 년이 지난 뒤 그의 후손들이 중건해 지금껏 소중히 지켜낸 일두고택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해 두었기에 부푼 마음을 안고 말이지요.^^ 미스터선샤인의 여주인공 애기씨 고애신이 되어 볼 생각에 발걸음은 더욱 빨라만 집니다. 함께 가실 거지요?~^^

 

'일두선생 산책로'에 오르면 수 백 년 된 노송들 사이로 그림처럼 펼쳐지는 개평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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