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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n 14. 2023

미스터 션샤인 애기씨 되어 보기(^^)

혼자라 좋은, 시골 인문학여행 - 함양편 3

https://brunch.co.kr/@storybarista/47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위기의 전통마을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 마을은 어디일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경주의 양동마을을 떠올릴 겁니다. 두 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입니다. 때문에 널리 알려져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지요.


그런데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마을 주민들의 고통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수시로 관광객이 불쑥불쑥 집안으로 들어와 기웃거리는가 하면 흥에 겨워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통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또 이들 마을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기와집은 기와지붕으로, 초가집은 초가지붕으로만 수리할 수가 있는데 초가집은 비가 새고 온갖 벌레가 들끓어 매년 지붕을 새로 엮고 살충제까지 뿌려야 합니다. 하지만 마을 주민은 연로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초가지붕을 매년 새롭게 엮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유네스코가 두 마을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할 당시 수백 년 동안 후손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이 전통 마을에서 살아온 점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런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한 방송사의 취재를 통해 최근 알려지기도 했지요.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민이 떠나버린 전통 마을은 민속 마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전통 마을의 정체성이 모호해져 관광객은 관광객대로 실망만 하고 돌아서게 되니 그야말로 전통 마을의 대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아있는 이들과의 공존을 위한 제도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하겠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새 낡은 지붕에 천막과 비닐, 폐타이어 등으로 응급조치 한 양동마을의 모습입니다.아...-.- (2023.5.24일자 JTBC 뉴스)

                            

일두고택에서의 하룻밤     


유명세를 단단히 치르고 있는 하회마을, 양동마을과는 달리 원래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마을도 적지 않습니다. 봉화의 닭실마을과 바래미마을, 산청의 남사마을, 함양의 개평마을 등이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개평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함양의 개평마을은 ‘좌안동, 우함양’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대표적인 양반 고장 함양의 대표적인 마을입니다. 오백 년 전부터 형성된 하동 정 씨와 풍천 노 씨의 집성촌으로, 앞 선 글에서 소개한 조선 성리학의 대가 일두 정여창(1450~1504)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개평마을에는 정여창의 일두고택을 비롯해 수백 년간 대물림해 온 오담고택, 풍천 노 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하동 정 씨 고가 등 유서 깊은 고택들이 즐비합니다. 보여주기 위한 전시공간이 아닌 여전히 사람들이 일상을 꾸려나가고 있는 현재형의 집들이지요.                     

                      

평촌천을 좇아가며 형성된 개평마을은 비가 온 뒤에 더욱 운치 있지요. 콸콸콸 흐르는 물소리만이 고요한 마을을 감쌉니다.
돌로 포장된 골목길과 낮은 돌담이 정겹습니다~


남계서원과 함양읍내 답사를 마친 뒤 일두고택으로 향합니다. 일두고택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일두고택은 정여창이 태어난 곳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 뒤 후손들이 중건해 지금까지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입니다. 3천 평의 대지에 원래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 별채(안사랑채), 문간채, 사당 등 11동의 건물만이 남아 있지요. 18C에 개축된 사랑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16~17C에 건축되어 매우 유서가 깊습니다.


일두고택에 도착해 연락을 드리니 주인어른께서 마중 나오십니다. 손님을 대하는 어르신의 몸가짐이 인상적입니다. 뭐랄까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단정하고 정갈한 태도가 몸에 밴,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에도 기품이 느껴지는 어르신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어르신의 선조 정여창 선생을 상상하는 일이 수월해집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어르신께서는 어제 부인이 돌아가셔서 상중이라 말씀하십니다. 휴가를 오는 손님들에게 폐가 될까 갑작스러운 취소는 하지 못했지만 챙겨주기 어려울 테니 양해를 구한다는 얘기셨지요. 어르신의 여동생분이 우리가 묵을 안사랑채와 집안 곳곳을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옆집에 머물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런데 이 큰 집에 손님만 계시는데 무섭지 않겠어요? 전 어릴 때 이 오래된 집이 너무 무서웠거든요.”      

“아... 네. 괜찮습니다. 큰일을 당하셨는데 받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이 큰 집을 건사하던 종가의 며느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렇게 넓은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목재가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관리하려면 평생 무척이나 부지런하셨겠구나 생각하니 한 번도 뵌 적 없는 안주인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납니다.  


초헌(종 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가마)이나 말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고 문을 높게 만든 솟을대문은 사대부가의 권위의 상징입니다~
솟을대문에는 붉은색 목판에 흰 글씨로 효자, 충신이라 적은 5개의 정려(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내린 표창장)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일두고택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지요~


그런데 일두고택의 주인어른이신 정병철 선생님을 비롯해 양동마을 ‘향단’의 종부 이난희 선생님, 봉화 바래미마을 '만회고택'의 김시원 선생님 등 고택스테이로 인연을 맺은 후손 분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집과 고귀한 가문의 역사를 지키겠다는 한결같은 자부심입니다. 나무로 지은 옛집을 수리, 보수하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의 고됨과 불편함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도 전통의 계승을 선택한 후손들의 결심이 놀랍습니다.


후손들이 물려받은 것은 집뿐만이 아닙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동안 정성을 다하고 조상의 이름에 누가 될까 삼가고 또 삼가는 모습을 보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품위가 느껴집니다. 그런 우아함과 기품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지요. 그러니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요. 그분들의 노고 없이는 이런 멋진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 테니까요.


미스터 션샤인의 극 중 고사홍 대감이 사랑채의 높은 기단 위에 서서 호령하는 모습은 위엄 그 자체였지요. 사랑채 오른쪽에 제가 머문 안사랑채의 지붕이 슬쩍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두두둑두두둑~’

나무집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온갖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낮에 여동생분께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금방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입니다. 평생의 손때가 묻은 이 정든 집과 가족들을 남겨두고 안주인께서 훨훨 맘 편히 떠날 수 있을까, 부디 좋은 곳으로 가소서 기원하며 뒤척이다 잠이 듭니다.             

           

미스터 션샤인의 극 중 애기씨 고애신(김태리 분)의 거처였던 안사랑채는 며느리에게 안채를 내어준 뒷방마님의 거처라 전해집니다. 애기씨가 되어보는 특별한 경험이 즐겁습니다^^


새소리, 신선한 공기에 저절로 눈이 떠졌는데 몸이 무척 가볍습니다. 아침 산책을 위해 마을 골목길을 따라 걷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3~4백 년 전으로 훌쩍 날아온 것만 같습니다. 개천을 건너 ‘일두선생 산책로’라 부르는 마을 언덕길로 올라서니 수백 년 된 소나무숲이 장관을 이룹니다. 솔향기 짙은 시원한 아침 공기는 온몸의 세포를 깨웁니다. 와~ 안개 자욱한 산아래 펼쳐지는 개평마을은 신선의 마을일까요? 한가롭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잊지 못할 광경입니다.


   

일두선생 산책로를 따라 마을 언덕으로 오르면 푸른 들판과 기와지붕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개평마을을 만나게 되지요~


개평마을 일두고택에서의 하룻밤은 세계유산 지정에만 지나치게 목을 매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보여주기에 급급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편함과 부자연스러움을 담보해야 한다면 세계유산 지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때 보존도 가능하겠지요. 하물며 문화재청이 초가지붕을 억지로 강요해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게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초가집은 민속 마을(민속촌)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현재의 살아가는 모습을 존중하면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더욱 진정성 있는 보존이 아닐지 고민해 보아야겠습니다.     


하동 정 씨 집안 대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수한 가양주가 며느리 박흥선 명인에 이르러 '솔송주'로 꽃을 피웁니다. 한 병 사서 맛보니 더없이 깊고 향기롭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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