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 후 하천의 물이 불어나 쏴아아~ 경쾌하게 마을을 감싸 안고 흐릅니다. 안개 자욱한 산은 마치 신선세계 같지요. 함양의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인 개평마을 풍광입니다.
덕유산과 지리산 큰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는 덕분에 높은 산과 깊은 계곡,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풍부한 물로 산천이 아름다운 고장 경남 함양군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자리 잡은 산간분지입니다.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한양에 사는 임금의 기준에서 안동은 왼쪽, 함양은 오른쪽입니다.^^) 함양은 뛰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예로부터 안동에 견줄 만큼 학문과 문벌이 번성한 양반의 고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함양이 ‘우함양’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김종직과 그의 제자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등 뛰어난 영남 사림파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지만 그 연원은 함양 태수로 부임해 온 신라 말의 최치원(85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치원은 12세에 당으로 조기 유학 가 6년 만에 빈공과(당에 유학 중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 1등으로 급제하여 관리가 된 인재 중의 인재였지요. 24세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당 전역에 이름을 떨쳤고, 28세에는 신라로 금의환향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망하기 직전 상태로 그의 이상과 포부를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요. 지방직을 자청해 떠돌다 함양 태수로 있던 시기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유명한 개혁안을 제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는 함양을 흐르는 하천(위천)이 홍수가 나 넘쳐흘러 농경지와 가옥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게 했습니다. 이것이 점점 퍼져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을 이루었지요. 이는 지금껏 ‘상림(上林)’이라 불리며 함양군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답니다. 세월만큼 두터운 푸른 이끼옷을 겹겹이 두른 나무와 숲, 맑은 공기는 천년이 넘어도 사라지지 않는 값진 유산이지요.
상림에서 가까운 함양군청 앞에는 최치원이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는 제법 큰 규모의 2층 누각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1692년(숙종 18)에 중건한 학사루(學士樓)입니다. 최치원과의 인연을 고려해 후대 사람들이 지은 이름이라 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양으로부터 수백리 떨어진 이 고즈넉한 학사루에서 일어난 한 사소한 사건은 1498년(연산군 4)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불러온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 평화로워 보이는 학사루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건물의 균형미와 안정감이 뛰어난 함양군청 옆 누각 학사루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이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영남 사림파의 큰 스승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던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어느 날 학사루에 올랐습니다. 그때 류자광(1439~1512)이 함양에 놀러 왔다 써서 걸어놓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따위가 여기에 시를 걸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며 현판을 떼어 불태워버렸지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이 사건을 ‘학사루 현판사건’이라 부르겠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류자광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속이 편할 리가 없었겠지요. 당시 그는 조정의 실세로 지방관인 김종직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속으로 분을 삼키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류자광은 어떤 인물일까요? 그는 얼자(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태어난 탓에 과거를 볼 수 없었기에 경복궁의 건춘문을 지키는 한미한 무관의 직책으로 궁에 들어갑니다. ‘이시애의 난’(1467, 세조의 집권정책에 반대해 함경도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난)이 일어나자 토벌 방책을 상소해 세조에게 발탁, 승승장구하는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하지만 토벌군으로 함께 공을 세운 남이를 역모로 몰아 죽인 공으로 군(君)에까지 올라 거들먹거린다 하여 의(義)를 중시하는 사림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지요. 출신성분에 열등감이 있던 류자광은 ‘학사루 현판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무시하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피의 복수를 시작합니다.
훈구파와 사림파 힘겨루기의 서막을 연 무오사화를 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1464~1498)이 “훈구파 이극돈이 정희왕후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기생과 어울리고 뇌물을 받은 사실이 있다.”라고 사초(사관이 기록한 초고로 실록의 원고)에 올린 일이 있었는데, 이를 알고 이극돈이 고쳐주기를 청하였지만 김일손은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성종이 죽고 뒤를 이은 연산군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을 개설하고 이극돈을 당상관으로 임명하지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류자광은 이극돈과 손잡고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실은 김종직의〈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습니다.
“단종의 폐위 사건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義帝)에 비유하여 은근히 세조를 비방하고 단종을 조위한 글이며, 세조를 비방한 김종직은 대역 죄인, 김일손이 악독한 것도 김종직이 가르친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에 훈구파가 가세하여 상소하자, 사림의 간언(諫言)에 염증을 느끼던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짓습니다. 김종직은 이미 죽은 뒤임에도 무덤을 파서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목이 베어지고, 정여창, 김굉필 등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갔습니다.
이것이 현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사림파와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훈구파의 갈등을 배경으로 일어난 무오사화이며, 이로써 많은 사림이 류자광과 훈구파에 의해 크게 화를 입고 세력이 위축되었지요. 그 후에도 사림은 갑자사화(1505),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 등 세 차례의 사화를 더 겪지만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지방에서 성장을 계속해나가 선조 대에 이르러 오히려 정계의 주류를 이루니 놀랍습니다.
2019년, 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는 소식은 기쁨에 앞서 당혹스러움이었습니다. 그토록 공을 들인 서울 한양도성이 등재에 실패한 후라 더욱 그랬지요. 세계유산 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한국의 서원은 교육기관으로 성리학과 관련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며 교육과 사회적 관습의 형태로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기 때문" 이라고 밝혔습니다. 유교의 전통이 한국인의 생활과 정신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에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서원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조선말에 이르러 1,000여 개까지 늘어난 서원을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으로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47개 중 단지 9개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니 선정된 9개의 서원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더욱 클 수밖에 없겠지요.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백운동서원, 경북 영주)을 필두로 남계서원(경남 함양),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필암서원(전남 장성), 도동서원(대구광역시), 병산서원(경북 안동),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때 경남 함양이라는 고장을 처음 주목하게 되었지요. 전국에 걸쳐 선정된 9개의 서원 중 유독 함양의 남계서원은 저에게 낯선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9개의 서원을 하나씩 찾아가는 답사가 시작되어서도 남계서원은 가장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였고,남계서원을 중심으로 한 함양 답사를 계획할 때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답니다.
그랬던 함양으로의 답사 기행은 예상치 못하게도 제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감동과 기억을 남겨줍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기품 넘치는고장 함양과 무오사화 당시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갔다 그곳에서 죽은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배향한 남계서원, 정여창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지켜내고 있는 일두고택을 찾는 아름다운 여정에 대한 것입니다. 함께 가실 거죠?^^
주변은 온통 산이지만 아늑한 평지에 약간의 둔덕에 기대어 지어진 단정한 남계서원입니다.
'일두고택'은 제가 사랑하는 드라마 '미스터선샤인' 촬영지로 애기씨 고애신(김태리 분)이 살던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