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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an 10. 2022

'너무 시골' 봉화에 가보셨나요?

혼자라 좋은, 시골 인문학여행 - 봉화편 1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이 이사를 하면서 학교를 옮기게 되었던 나에게 미영이는 구세주와도 같았습니다. 새로 이사 간 곳에서 나는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 키가 크고 예쁘장했던 미영이는 함께 등교하자며 우리 집 대문 앞에서 기다려주기도 하고 학교가 파하면 동네 곳곳을 알려주던 다정한 친구였지요. 하지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고등학교를 서로 다른 곳으로 다니면서 소식이 끊어지더니 미영이는 어느새 그만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답니다.    

  

미영이를 다시 만난 건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훌쩍 넘어 마련된 초등학교 동창회 자리에서였어요.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서울에서 대구까지 한달음에 달려갔지요. 예전처럼 키가 크진 않았지만 여전히 예쁘고 멋지게 잘 차려입은 미영이는 아쉽게도 나와의 추억을 잘 기억하지 못했어요. 서로 어색하게 몇 마디 주고받던 중 미영이는 투덜거리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대구를 떠나 봉화로 간지 몇 년 되었어. 근데 말이야. 봉환 너무 시골이라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내가 어쩌다 그런 시골까지 가서 살게 됐는지......”     


아, 봉화!

봉화는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대구 사람들에게조차 ‘너무 시골’인 오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상북도 사람들은 우스개로 경북의 3대 오지를 BYC라 부르는데 봉화, 영양, 청송이 바로 그곳입니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지 않아 교통이나 편의시설이 부족해 불편함은 있지만, 그 덕분에 지역의 색깔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들이지요. 


BYC를 포함한 경북 북부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은 대단해서 북부 아래 지역 사람을 하도 사람(下道)이라 낮추어 부르는 것을 간혹 보기도 합니다. 자긍심을 가질 만큼 전통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여 전통문화가 잘 보존·계승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하다 싶습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서도 내내 미영이 말대로 ‘너무 시골’인 봉화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지요. 나는 오래지 않아 마침내 ‘너무 시골’, 봉화로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경상북도 봉화군의 위치입니다. (붉은색 표시 부분, 진회색 부분은 경상북도)


봉화군은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태백산(1567m)과 선달산(1,236m) 능선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태백산과 선달산을 지난 백두대간이 경북 봉화와 영주, 충북 단양을 거쳐 남서방향으로 뻗어 내려가 소백산(1,440m)에 이르게 되니, 이름난 산들로 둘러싸인 덕분에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고장이 바로 봉화입니다.      


가까이로는 동북쪽으로 겹겹이 각화산(1,177m), 문수산(1,206m)이 병풍처럼 봉화를 감싸고, 남쪽으로는 12개의 빼어난 바위 봉우리가 절경이라 소금강이라고도 불리는 청량산(870m)이 봉화를 아늑하게 안습니다. 문수산 해발 800m 고지에 위치한 천년고찰 축서사에서 바라본 떠가는 구름인 듯 흐르는 물인 듯 펼쳐진 웅대한 소백산 능선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소백산 능선의 부드러움은 모든 것이 괜찮다 나를 토닥여 주고, 그 웅대함은 용기를 내라 나를 다그치는 것만 같았지요. 어디선가 본 듯한 그 광경은 영주 부석사에서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절은 같은 산, 같은 풍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석사와 축서사 두 절을 창건한 의상대사가 사랑한 풍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봉화를 관통하는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 상류는, 청량산 기슭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 안동호에까지 가 닿습니다. 청량산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과 나란히 달리는 35번 국도는 가히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라 할 만하지요.                                                            


문수산 축서사에서 바라본 완만하고도 장엄한 소백산 능선은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풍광과 닮았네요!
낙동강은 청량산을 끼고 봉화를 관통하지요.

              

우리나라 최고급 전통 건축에 사용된 으뜸 목재, 춘양목    

 

한편 봉화하면 춘양목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목재는 소나무입니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참나무를 주로 사용했지만 고려시대부터 소나무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해 조선 후기에 이르면 88%에 육박하게 됩니다. 소나무 중에서도 궁궐이나 관청, 세도가의 집을 짓는 데 사용된 최고급의 소나무는 금강송입니다. 겉껍질이 붉어서 적송(赤松)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 측 기록에서는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 명칭으로 일제에 의해 불리기 시작했다고 여겨집니다. 금강송은 줄기가 매우 곧게 자라서 목재로써 더할 나위 없습니다. 게다가 성장 속도가 일반 소나무에 비해 3배 이상 더뎌서 나이테가 좁고 치밀해 뒤틀림도 거의 없습니다. 송진 함유량이 많아 잘 썩지 않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금강송은 금강산 아래에서부터 울진, 영덕까지 백두대간을 따라 분포해 있는데, 예로부터 금강송의 집산과 가공, 반출이 이루어지던 곳이 바로 봉화의 춘양 지역입니다. 그래서 금강송을 춘양목이라고 흔히들 부릅니다.


1930년대부터 전쟁에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가 마구잡이로 벌목한 금강송을 봉화에서 말린 후 영주로 옮겨 부산까지 기차로 실어 나른 후 일본으로 싣고 가 전쟁용 배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하니 봉화와 춘양목의 아픈 역사도 눈여겨보아야겠습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춘양목의 곧은 자태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찬사와 사랑을 받아왔지요.
일반 소나무(왼쪽)와 춘양목(오른쪽) 나이테를 비교해 볼까요? 

                                             

봉화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의외의 사실들     

 

봉화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천혜의 자원은 봉화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마치 일부러 꽁꽁 숨겨놓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봉화에는 알려지지 않은 놀랄만한 몇 가지 사실들이 더 있습니다.      


첫 번째는 봉화군의 면적은 1,200 km²로 서울의 두 배에 이르지만 인구는 3만 1천여 명으로 인구 밀도가 전국 최하위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봉화 여행을 하면서 귀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지방, 특히나 농촌마을의 가장 깊은 고민거리 중 하나이겠지요.      


두 번째는 1988년 기상관측소를 설치해 관측을 개시한 이후 봉화는 단 한 번도 열대야를 기록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매년 여름이면 보통 10~20일간의 열대야와 싸우느라 잠을 설치는 대다수의 도시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부러운 기록인가요? 도시의 열섬현상은 봉화에서만큼은 남의 나라 일과도 같습니다.  봉화는 내륙 산간지역인 까닭에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평균 기온이 낮고 일조량도 부족한 편입니다.             


세 번째는 풍부한 춘양목 덕분에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를 보유하고 있는 고장이라는 점입니다. 봉화를 여행하다 보면 끊임없이 각각 다른 구조를 가진 개성 있는 정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던 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봉화에는 집성촌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 집성촌에는 종가를 비롯한 수많은 고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전시용이 아니니 함부로 기웃거리는 것은 삼가야겠지요. 북지리의 봉화 금씨 마을, 법전의 진주 강씨 마을, 해저리와 황전의 의성 김씨 마을, 오록의 풍산 김씨 마을, 닭실의 안동 권씨 마을 등이 그것입니다. 양반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소중히 보존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 집니다.


봉화의 랜드마크, 닭실마을과 청암정    

         

넘실넘실 풍요로운 논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닭실마을의 권벌 종택을 바라봅니다. 참 단정합니다.


봉화의 많은 집성촌 중에서도 닭실마을은 예로부터 잘 알려진 명승지입니다.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봉화의 유곡을 삼남의 4대 길지로 꼽았습니다. 유곡(酉谷)은 한글로 ‘닭실마을’이라고 부릅니다.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이라 그리 불립니다.


닭실마을은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1548)의 5대조가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 잡은 곳으로 권벌 이래로 매우 번창한 안동 권씨 집성촌입니다. 문수산 서남쪽 자락인 백설령이 아늑하게 마을을 둘러싸고 있고, 가계천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 넘실넘실 물을 댄 마을 앞 논이 풍요로워 보입니다. 오래된 전통 가옥들이 죽 늘어선 이 마을의 서쪽 끝자락, 제법 큰 규모의 고택이 바로 권벌의 종택입니다. 종택의 쪽문 뒤편으로는 권벌이 1526년 집의 서쪽에 재사(齋舍)를 지으면서 그 옆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에 지은 정자, 닭실마을의 슈퍼스타 ‘청암정(靑岩亭)’이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도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며 서있습니다.                                                                    

바위 위 당당하게 자리 잡은 정자, 닭실마을의 슈퍼스타 '청암정'입니다! 
3칸짜리 간결한 서재인 충재가 청암정과 마주보고 있네요.


이중환은 ‘안동의 북쪽에 있는 내성촌에는 충재 권벌이 살던 옛터인 청암정이 있다. 그 정자는 못의 한 복판 큰 바위 위에 위치하여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둘러싸듯 흐르므로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 또 북쪽은 춘양촌인데 태백산 남쪽이다. 정언(正言) 권두기(權斗紀)의 한수정(寒水亭)이 여러 대로 보존되어 있다. 날 듯 한 집이 시내를 임하여서 아늑하고 묘한 운치가 있다.’라고 권벌 집안의 두 정자인 청암정과 한수정을 본 감회를 기록했습니다.      


청암정에서 마당을 내려다보면 달랑 3칸짜리 소박하지만 귀품이 느껴지는 서재 ‘충재(沖齋)’가 돌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암정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서재의 이름인 충재는 권벌이 자신의 호로 이름을 정했습니다. 청암정의 ‘청암’은 권벌의 큰 아들 권동보(權東輔, 1518~1592)의 호이기도 합니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두 건물의 ‘케미’가 돋보입니다. 불규칙적인 배치 안에 공간감과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따로가 아닌 같이라 더 운치가 있습니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옛사람들의 발걸음을 청암정 내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은 ‘청암수석(靑岩水石)’이라 전서체로 쓴 현판을,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청암정(靑岩亭)’ 현판을 남겼습니다. 권벌 사후 20여 년이 흐른 뒤 65세의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이곳을 찾아와 권벌을 그리워하고 청암정을 칭송하는 ‘청암정제영시(靑岩亭題詠詩)’라는 시를 남겼으니 지금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이미 스타 대접을 받은 듯싶습니다.      


권벌은 이곳 충재에서 경학(經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휴식이 필요하면 호젓이 청암정에 올랐을 테지요. 그러나 충재와 청암정을 오가며 향촌의 유림으로 편안한 일생을 보냈을 것 같은 권벌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권벌만큼 부침이 심한 관직생활을 한 이도 드물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관직에 들어서기 위한 첫 관문에서부터 고난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니까요.      


청암정과 충재가 이루어내는 간결하고도 탁월한 조화에 넋을 잃습니다. 

권벌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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