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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an 11. 2022

글자 한 자 때문에 과거시험 합격이 취소된 사람

혼자라 좋은, 시골 인문학여행 - 봉화편 2

'너무 시골' 봉화에 가보셨나요? https://brunch.co.kr/@storybarista/2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1505년(연산군 11년) 4월 1일, 궁에서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여느 때와 같이 처용무를 추며 음란한 행동을 벌이고 있던 연산군에게 상선 김처선(金處善,?~1505)이 결심한 듯 아룁니다.

“늙은 몸이 역대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에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마마와 같은 분은 없었사옵니다.” 직간에 분노한 연산군은 활을 쏘아 김처선을 쓰러뜨렸지만 김처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임금을 향해 “조정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상감마마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게 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이 충성스럽고 용기 있는 늙은 내시의 다리를 베고 혀를 잘라 살해했지만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김처선의 양자를 죽이고 칠촌까지 벌을 주는가 하면 그가 태어난 고향집은 연못으로 만들어버리고, 온 나라에 김처선의 처(處) 자와 선(善) 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전국의 김처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개명이 명해졌고 그 바람에 연산군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處容舞)조차도 풍두무(豐頭舞)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성몽정(成夢井, 1471~1517)이란 사람은 상소에 ‘처(處)’자를 써서 올렸다가 국문을 당하던 도중 천만 다행히 법 제정 이전에 상소가 써졌다고 밝혀져 국문을 중단시키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때 스물일곱 살의 권벌은 과거 급제의 기쁨도 잠시,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답안지에 처(處) 자를 썼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재수가 없는 선비 권벌은 이를 악물고 3년 뒤 재도전해 과거에 급제한 뒤 그제야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벼슬살이는 그 후로도 평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16세기 조선 관료사회를 뒤흔든 사화(士禍)의 직접적인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권벌은 두 번이나 사화로 고초를 겪었는데, 그 첫 번째는 바로 1519년(중종 14) 권벌이 마흔두 살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였습니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의 급진적이고도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이 조광조와 그를 지지하는 사림 일파를 처단한 사건으로 이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권벌은 봉화 닭실마을로 귀향하게 됩니다. 충재와 청암정은 그가 1533년 복직될 때까지 14년간 은거하며 세상을 잊고 독서에 몰입한 곳입니다.      


쉰다섯에 복권되어 다시 관료의 길을 걷게 된 권벌은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병조판서, 한성부 판윤,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1545년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료로서의 삶에 또다시 시련이 몰아칩니다. 1545년 소윤 윤원형 세력이 대윤 윤임의 세력을 배척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 일파를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결국 소윤파에 의해 파직되어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잠재적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소윤파의 음모에 휘말려 결국 평안도 삭주까지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일흔으로 노인의 몸으로 경상도에서 국경지방까지 걸어가기엔 무척 버거웠겠지요. 이듬해 그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사후 20년이 안되어서 그의 의로움은 밝혀졌고 신원(伸寃)되어 좌의정, 영의정에 차례로 추증되었습니다. 그는 문집인 『충재집(沖齋集)』과 일기 『충재일기(沖齋日記)』를 남겼는데, 특히 『충재일기』는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사료를 대신해 『중종실록』 편찬 자료로 사용될 만큼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왜 한수정(寒水亭)인가?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한수정은 주변에 물길을 두어 마치 섬처럼 보입니다. 

     

2019년 12월, 봉화의 무수한 정자들을 제치고 심지어 봉화의 자랑인 권벌의 청암정마저 따돌리며 춘양면의 한수정(寒水亭)이 보물 제2048호로 지정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수정은 앞서 소개한 『택리지에서도 청암정과 함께 언급된 적이 있지요. 원래 권벌이 지은 ‘거연헌(居然軒)’이라는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자 1608년(선조 31)에 그의 손자인 권래(權來)가 다시 세우고 이름을 한수정이라 고쳤습니다.      


춘양면의 한수정은 닭실마을의 청암정과 무척이나 닮아있습니다. 우선 두 정자 모두 T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봉화의 대부분 정자의 평면 구조는 좌우대칭의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거나 정방형입니다. 기온이 낮은 산간지대라 찬바람을 막기 위해 다소 폐쇄적인 구조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추운 겨울을 대비해 대청마루 양쪽에 모두 온돌방을 두기도 합니다. 봉화보다 겨울에 온화한 기후를 가진, 정자로 유명한 또 다른 고장인 전라남도 담양의 정자들은 온돌방보다 마루의 비중이 더 높습니다.

춥고 혹독한 겨울과 혹서의 여름을 동시에 나기 위해 이렇게 한 지붕 아래 온돌과 마루를 연속으로 배치하는 것이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이자 독창성입니다. 획기적인 창안이라 불리기까지 하지요.


황전마을의 도암정은 마루 양쪽에 온돌방을 둔 대표적인 중당협실형 정자입니다.
전면 2칸은 마루를 깔고 후면에 온돌방 2칸을 둔 대표적 정방형 정자인 법전면의 경체정입니다.


그렇다면 청암정과 한수정이 봉화에서 흔한 중당협실형이나 장방형이 아닌 T자형 구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청마루 외에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누마루를 설치하기 위해 그와 같은 구조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연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입니다. 청암정은 거북모양의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세웠고, 한수정은 ‘초연대’라고 새긴 바위를 정자 정면에 자연스럽게 두었습니다. 이렇게 주변의 자연을 십분 활용하고 정자의 주변은 물길을 내어 연못으로 두릅니다. 이로써 정자는 바위와 물과 울창한 나무가 어우러져 최고의 경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한수정은 주변 자연 경관을 결코 압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자연 속으로 초대받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 안에서 조용히 사색에 잠기게 됩니다. 이것은 봉화 안동 권씨 집안만의 독특한 건축과 조경의 방식이면서 또한 한국 전통의 미와 잘 닿아있습니다.       


청암정과 한수정은 무척 닮았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온돌방의 유무에 있습니다. 청암정 바로 맞은편에는 충재라는 간소하지만 마루 한 칸, 온돌방 한 칸, 그리고 부엌 한 칸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춘 완벽한 건물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청암정은 주로 여름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청암정에는 온돌방이 없고 2칸짜리 마룻방만이 마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수정은 양쪽으로 2칸짜리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어서 정자이면서도 살림집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안동 권씨 집안의 전답이 춘양면에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집이 있는 닭실마을에서 20여 km 떨어진 춘양면까지 왕래하려면 ‘세컨드 하우스’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한수정은 권벌 집안의 세컨드 하우스였던 셈입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단청입니다. 한수정과 달리 청암정에는 단청칠이 되어있는데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단청은 바람이나 벌레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거나 장엄의 목적으로 궁궐 내 건물이나 관아, 사찰, 서원 등 주로 격이 높은 건물에만 사용합니다. 일반 살림집은 법적으로 단청을 금지했습니다. 보통 들기름칠 정도로 마감합니다. 우리는 종종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수리나 복원 과정에서 과유불급이 되는 사례를 목격하게 됩니다. 진정성을 잃은 문화재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합니다. 단청 없이 백골집으로 둔 한수정만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 그것은 진정성에 있지 않았을까요?                              


선물같은 만회고택에서의 하룻밤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갈 즈음, 종일 걸어 팍팍해진 다리를 끌고 미리 예약해 둔 숙소로 향합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숙박업소들은 일찌감치 잊고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결정한 것은 두고두고 잘한 일입니다. 의성 김씨 집성촌 해저리(바래미마을)의 만회고택(晩悔古宅, 국가 지정 중요 민속자료 169호)은 봉화의 수많은 고택들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곳이기에 하룻밤을 청하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만회고택은 1830년(순조 30)에 과거 급제한 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낸 문신 만회 김건수(晩悔 金建銖, 1790~1854)가 살던 집으로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고, 안채(1690년경)는 김건수의 6대 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이곳에 살던 의령 여씨에게 구입했다 전합니다. 2019년에는 이 집의 현재 주인인 의성 김씨 종손 김시원 옹이 독립운동 관련 기록물 수백 점을 처음 공개하였습니다. 


이 기록물에 의하면 사랑채 명월루는 심산 김창숙 등 7~8명이 1919년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의 초안을 만든 역사적인 장소가 됩니다. 독립운동의 밑거름을 만든 역사적이고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장소에서의 하룻밤이라니!   

 

뿐만이 아닙니다. 도시에선 잊었던 이토록 밝은 별, 어느 집에선가 개가 짖고 마을 논에서 개구리가 목청껏 합창하는 소리, 그리고 아침을 알리는 부지런한 새들의 지저귐, 맑은 공기... 이 모든 것이 선물처럼 쏟아집니다. 참! 주인 어르신께서 정성스럽게 손수 내어주신 차와 아이스홍시는 덤입니다.  


하룻밤 청한 해저리 만회고택의 사랑채(청풍헌)에는 명월루라 따로 이름 붙여진 운치있는 누마루가 있지요.

                

드러눕고 싶어지는 반질반질한 대청마루를 가진  만회고택의 안채입니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그것을 활용한 음식을 맛보는 일일 것입니다. 봉화에 왔으니 예로부터 달고 약효가 좋기로 유명한 봉화 토종 대추와 춘양목 주변에서 잘 자란다는 송이버섯을 맛보고 9월이면 송이축제 구경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당도가 높고 육질이 단단한 봉화 사과도 맛보고, 돌아가는 길엔 닭실마을 권벌 종가의 5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한과 한 봉지 사들고 돌아가면 봉화 여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됩니다.


이후로도 나는 세 번을 더 이 품격 넘치는 ‘너무 시골’ 봉화를 찾았습니다. 새로운 것에 금방 현혹(?)되기 일쑤인 나를 잡아당긴 봉화의 그 무엇이 무엇이었을지 오래도록 곱씹어보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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