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초희와 남매간 정이 유난히 돈독했던 허균은 국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입니다. 허균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대에도 상반된 평가가 따릅니다. 한편에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며 그의 문장과 식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 사람됨에 대해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유학자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지만 당시에 이단시되던 불교와 도교에도 깊이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천주교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도 합니다. 허균은 당시 조선의 선비 사회에서는 매우 드물게 다양한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이해를 가졌던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 『홍길동전』에는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신분제도의 모순과 사회개혁을 주장했던 서얼 출신의 스승, 손곡 이달의 사상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허균은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나아가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피력합니다. 그 자신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조선사회 지배 계급의 정치와 학문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펼쳐나간 개혁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과 시대를 앞서간 사회 개혁 의지는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고 맙니다. 광해군 10년(1618)에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비밀 상소가 올라가고, 민심 불안을 조장하는 격문을 남대문에 붙여 도성 안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이 더 붙어 역모 혐의를 벗지 못한 채 쉰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지요. 비록 허균은 대역 죄인으로 죽었지만 그를 따르던 백성들도 많았습니다. 잘린 허균의 머리를 수습하려다 잡혀간 사람도 있었고 그가 처형된 뒤로도 몇 달 동안 그를 따르던 이들이 계속해서 잡혀 들어가 귀양을 가거나 고문 끝에 죽었습니다. 조선 왕조 내내 그의 명예는 복권되지 못했으나 그가 꿈꾸던 이상 사회는 당시 모두가 천시하던 한글로 쓰인 『홍길동전』을 통해 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허균의 시비가 있는 애일당 터
허균이 태어난 곳이라 전해지는 애일당(愛日堂)터로 가보기로 합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8km가량 가다 보면 <허균 시비(詩碑)>라 적힌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부터 350m가량 산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눈에 띄는 곳이 아니라 지나치기 쉬우니 잘 살펴야 합니다. 너른 터가 나오고 그곳에서 숲길로 들어서면 드디어 고요히 홀로 서 있는 <교산 시비(蛟山 詩碑)>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 시비는 1983년 전국 시비 건립 동호회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교산(蛟山)은 허균의 호이자 애일당 뒷산의 이름입니다. 그 야트막한 산의 형상이 마치 이무기가 누워있는 듯 구불구불한 모습이라 하여 교산(蛟山)이라 하였는데 허균이 이 산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지을 만큼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한 애착이 컸기 때문입니다.
교산 시비 전면에는 시인 김동욱이 번역한 허균의 시 <누실명(陋室銘, 누실은 누추한 방, 명은 걸어놓고 마음에 새긴다라는 의미)>의 일부가 새겨져 있습니다.
빈 항아리 차를 거우르고
한 잡음 향 피우고
외딴집에 누워
건곤 고금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 져.
그리고 시비의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적혀있습니다. “...... 허난설헌 초희와 다 문장으로 이름나다. 교산은 벼슬을 하였으나 자유분방한 성품 때문에 자주 부침하고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10년(1618) 역모를 꾸몄다 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국문 소설 <홍길동전>은 바로 작자 교산의 분신일 듯싶다. 이밖에도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학산초담(鶴山樵談)』 『한정록(閑情錄)』 등은 다 주옥같은 시와 문장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도 없지만 <교산 시비>가 있는 이 언덕배기에는 원래 그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애일당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애일당은 원래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오대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졌는데 아들 없이 딸만 두었던 김광철은 자신이 아들을 얻기 전에는 사위와 딸이 애일당에서 자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허균의 부모는 장인 몰래 애일당에서 동침하여 허균의 형인 허봉을 낳았습니다. 그 후 허균 역시 애일당에서 태어난 뒤 친가가 있던 경포호 옆 초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서울의 마른 내(지금의 오장동)로 이사하게 됩니다. 이에 강릉 김 씨가 받을 명당의 정기가 양천 허 씨 자손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24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단천으로 피난 갔던 허균은 그곳에서 아내가 첫아들을 낳았으나 산후조리를 잘 못해 숨지고 아이마저 숨져 실의에 빠집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함경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강릉으로 가 애일당에서 2년간 머물며 고통받은 마음의 상처를 씻었을 것입니다. 고향의 따뜻한 품에서 에너지를 얻은 허균은 다시 상경해 정시 문과에 합격, 승문원 사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던 것이지요.
명문가에서 태어나 뛰어난 시와 문장으로 죽어서도 그 이름을 떨친 허초희, 허균 남매지만 두 사람의 삶은 굴곡지고 불행하기만 합니다. 이 남매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살다 간 동시대의 이웃이 있습니다. 바로 초당 고택에서 경포호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죽헌(烏竹軒)의 주인공인 사임당 신 씨(師任堂 申氏, 1504~1551)와 아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3) 모자입니다. 조선 성리학에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쌍벽을 이루는 주기론(理氣論)을 펼친 대사상가인 율곡 이이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현모양처의 본보기인 사임당 신 씨는 조선시대는 물론 현대에까지도 추앙받는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임당 신 씨는 17세기에 이르러 송시열 등 유학자들에 의해 현모양처의 롤모델로써 한층 더 이데올로기화 되었습니다. 현숙함과 온화함을 갖추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낸,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천부적으로 타고난 예술적 재능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 되어버린 감이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풀벌레·포도·화조·매화·난초 등을 주제로 한 40여 점의 섬세하고도 생생한 그림을 남긴 화가이자,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사친(思親)>과 같은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를 남긴 시인으로서의 사임당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율곡과 사임당의 이러한 위상을 입증이라도 하듯 모자의 초상은 현재 오천 원권과 오만 원권 지폐의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고, 사임당 신 씨의 친정집이자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은 겨레의 어머니와 민족의 스승이 태어난 성지로 추앙받고 있어 들어가는 입구부터 그 규모가 남다릅니다. 조선시대 내내 신원이 회복되지 못한 이웃의 허 씨 집안 남매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허초희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이미 사라져 버려 지금의 초당 고택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조선 초기에 지어져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오죽헌을 보는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넘침이 모자람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한 안채, 곳간채, 사주문 등이 해체되고 문성사(文成祠)와 율곡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오죽헌 뒤편의 고택이 다시 복원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96년의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성역화되어 원래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고, 앞마당은 넓기만 해 휑하고, 감동도 멋도 없는 새로운 건축물들과 기념비석들만이 즐비한 강릉여행의 대표 ‘기념사진 찍기’ 장소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으리으리한 규모와 그 위세에 눌려 어서 벗어나고픈 심정이 됩니다, 동시대를 살다 간 강릉의 두 천재 여류 예술가, 허초희와 사임당 신 씨의 너무 다른 삶의 궤적과 대접에 마음이 먹먹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율곡 이이와 같은 훌륭한 자식은 고사하고 자신을 기억해줄 단 한 명의 후손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급히도 등진 허초희는 어디에 묻혔을까요? 허초희를 만나는 여행은 강릉에서 끝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광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 김 씨 묘역에는 허초희와 어려서 돌림병으로 죽은 두 아이의 무덤이 있습니다. 허초희의 무덤을 백방으로 찾던 사람들은 1969년에 시가의 종산인 광주 경수산에서 그녀의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1985년 중부고속도로 개통으로 5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지게 됩니다. 묘역 입구에는 중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종중 땅을 내어준 안동 김 씨 서운관 정공파 종중에 감사하는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져 있고, 묘역의 한쪽에는 잘 지은 사당과 재실도 보입니다.
두 아이의 무덤과 조카 희윤을 위해 허봉이 지은 시비
축대로 쌓아 올린 3단으로 된 묘역의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갑니다. 가장 먼저 만나는 작은 두 봉분은 허초희가 ‘곡자(哭子)’에서 그토록 애달파한 어려서 떠나보낸 딸과 아들의 무덤입니다. 그 작은 무덤 앞에는 오빠 허봉이 지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苗而不秀者喜胤也)’라는 시가 적힌 비석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애잔하게 만듭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이 아버지 성립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첨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에 부치노라.
두 아이의 무덤 뒤로 꿈에도 못 잊을 그리운 아이들을 품에 꼭 감싸 안고 있는 것 같은 허초희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녀와 두 자녀의 무덤 위쪽으로 한 단 더 올라가면 남편 김성립과 두 번째 부인인 남양 홍 씨의 합장 무덤이 있습니다. 남편 김성립은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던 중, 허초희가 세상을 떠난 1589년 바로 그 해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정 9품)에 임명됩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싸우던 중 전사하였고 시신조차 찾지 못해 의복만을 가지고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1985년 묘를 이장할 때 후손들이 첫 번째 부인인 허초희의 무덤 위치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옛 선조들의 뜻에 따라 이장 전의 형태 그대로 위치를 정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묘한 슬픔이 밀려와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허초희를 만나는 발걸음은 이제 이곳에서 멈췄지만, 그녀는 멈추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러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꾼 허균의 소설과 함께 허초희는 아름다운 시를 통해 세상과 여전히 단단히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의 의미처럼 난초의 청초함과 눈의 깨끗함을 가졌던 그녀가 여성의 재능에 냉담했던 부조리한 세상과 결별하고 비로소 자유로워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제야 나는 서울로 발길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