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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Dec 28. 2023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

규슈에 새긴 한국사 12

‘조선인 도공 마을’과 ‘심수관’이라는 이름이 일본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은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단편 소설,『고향을 어이 잊으리까(故鄕忘じがたく候)』(1965) 덕분입니다.


신문사의 도쿄지국 기자인 소설의 화자는 가고시마 여행 중 지도에서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지명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나에시로가와’를 도자기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는 나에시로가와(지금의 미야마 마을)로 곧장 달려갑니다. 그곳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심수관(14대)을 만나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이 마을의 독특한 내력과 심 씨 집안의 오래된 사연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게 되지요.   

  

실제로 시바 료타로는 신문기자 출신이고, 사료에 입각한 고증을 통해 소설을 쓰는 역사소설가로 유명합니다. ‘시바 사관(史觀)’을 낳을 만큼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의 소설은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실감이 납니다. 나를 미야마 마을로 이끈 것도 바로 그의 소설이니까요.    

 

소설은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에서 태어났고 나에시로가와에서 자란 심수관이 한국식 이름을 가진 연유를 설명하기 위해 400여 년 전 정유재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남원성 전투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1597년 8월, 5만 6천의 왜군이 남원성을 총공격합니다. 4천 명 남짓의 조·명 연합군과 6천 명의 성안 백성들이 사흘 밤낮을 항전했지만 끝내 남원성은 함락되어 불바다가 되고 맙니다. 이때 심수관의 선조 심당길, 박평의 등을 비롯한 조선인 도공들은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에 의해 납치되어 사쓰마로 보내지지요.      


전라북도 남원시에 남원성 북측 성벽 일부가 남아있지만 횡한 그곳에서 처절했던 전투를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전사자 시신을 합장한 만인의총도 상념을 주기엔 너무 말끔했지요.


시마즈 요시히로가 전쟁 중에 조선 도공들을 납치한 것은 다완(茶埦)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귀족 사회에 다도의 취미가 유행했지만 번주조차 나무 그릇을 사용할 정도로 자기는 귀했기에 조선의 다완은 그야말로 금값이었지요. 다도에 조예가 깊었던 쓰시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를 비롯한 많은 다이묘들이 전쟁 중에 조선 도공들을 잡아들이는 데 혈안이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남원성 전투에서 납치된 80여 명 중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가고시마 구시키노(串木野)의 시마비라(島平) 해변에 도착한 이들은 43명에 불과했습니다. 원주민의 방해로 다시 길을 떠난 이들은 13km를 더 걸어 고향산천과 닮은 나에시로가와에 겨우 정착하게 됩니다. 이들을 찾아낸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가 성내로 들어와 살라며 호의(?)를 베풀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고 번주의 명을 거절합니다. 사정은 이랬지요.

     

첫째는, 조선 관리였으나 왜군에 길을 내어준 반역자 ‘주가전(朱嘉全’)이 이미 성내에서 살고 있으니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 둘째는, 나에시로가와의 산지라쿠 언덕에 오르면 동중국해가 보이고 그 아득한 저쪽에 조선 산하가 있으니 그 언덕에서 제사를 지내면 조상의 넋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들이었지만 서릿발 같은 단호함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감동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나에시로가와에 살되 토지와 집, 그리고 녹을 주어 ‘조선 계열 17개 성씨’의 신분을 사무라이(武士)와 동급으로 대우하라 이릅니다. 또한 일본인에 의한 마을 침범이나 범죄행위를 엄벌로 다스려 도공을 보호하도록 했지요. 조선 도공들이 번주의 보호를 받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타지에서 나에시로가와에 시집오는 여성의 경우를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의 외부 유출 및 통혼을 전적으로 통제하였고, 일본식 이름이나 일본 의복의 착용도 금합니다. 번주가 수도인 에도로 참근교대(参勤交代)를 떠날 때 도공들은 조선식 춤과 노래를 선보였으며, 일종의 비서인 고쇼(小姓)를 자체적으로 선발, 조선 옷을 입혀 에도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도기제작기술을 번청(藩廳)에서 엄격히 통제했는데, 이는 번주 전용의 자기 생산과 조선식 풍습을 강제로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지요.


나에시로가와의 조선 도공과 그의 후손들은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자유롭게 살아간 것이 아니라  나에시로가와라는 섬 아닌 섬에 고립되어 버린 것입니다. 시바 료타로는 소설에, 『서유기(西遊記)』(1795)라는 기행문을 남긴 의사, 다치바나 난께이(橘南渓)가 이 마을을 방문하고 기록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에시로가와라는 고장은 온 마을이 고려인이다. (중략) 조선 풍속을 그대로 계승하여 복색에서 언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조선식이며 날로 번창해 수백 호를 이루고 있다. 처음 납치되어 온 성은 모두 17 성이었다.


또 다치바나 난케이와 신무문이라는 마을 노인과의 대화도 소개하고 있는데요,


다치바나 난케이: 당신은 일본에 오신 몇 대째가 되십니까?

신노인: 5대째가 되옵니다

다치나바 난케이: 일본에 오신 지 수 대를 지난 이제 와서 고국 조선을 그리는 일은 좀처럼 없으시겠지요?

신노인: 천만에요. 번주께서 보살펴주신 공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귀국이 허락된다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고향난망(故鄕難忘)이라고 누가  말이온지...        


보호와 통제의 이중정책 아래 조선 도공들은 겨우 안정을 찾고 본격적인 도자기 작업에 매진합니다. 도공의 우두머리 박평의와 그의 아들 박정용은 자기의 재료인 백토를 어렵게 찾아냈지만 화산 지대인 가고시마의 흙은 조선의 백토와는 차이가 있었지요.  빛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연구를 거듭한 박평의는 백토를 얇게 덧발라 굽는 방식으로 부드러운 계란색의 백자를 만들어내는  성공합니다. 이것이 우아한 흰 빛깔의 시로몬(白物)이라 불리는 사쓰마 백자이지요. 19세기 유럽인들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든 사쓰마야끼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일본 것이라곤 불밖에 없다는 뜻의 '히바카리(火計り)'라 부르는 초대 심당길의 백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뜁니다(심수관가박물관). 마을 공동묘지의 박평의 기념비 또한 마찬가지였지요.


번주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점점 발전해 나간 사쓰마야끼는 일본 각지의 유행과 기법을 모두 수용해 상아빛 살갗, 따스함과 부드러움, 화려한 금채기법까지 곁들여지며 한층 다채로워집니다. 심당길의 12대손인 심수관에 이르러 만국박람회의 상을 휩쓸어버릴 정도로 꽃을 활짝 피우지요.      


가고시마 이부스키(揖宿)시의 사쓰마전승관에서 만난 사쓰마야끼는 이제 일본 취향으로 발전해 나가 화려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자랑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사쓰마야끼의 이 같은 영화는 계속되지 못합니다. 메이지 유신(1868)으로 세상이 급변했기 때문입니다. 번이 폐지되면서 사쓰마야끼는 더 이상 번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사족 대우를 받던 조선 계열 도공의 신분은 평민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때 미야마(美山, 나에시로가와) 마을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대부분 수백 년간 이어온 가업을 버렸습니다. 게다가 조선이 일본에 침탈당하기 시작하자, 일본인 사회로부터 점차 차별대우를 받게 되고, 결국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까지 하게 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사실상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로지 심당길의 후손인 심수관 가문만이 국제적 명성을 얻은 심수관(沈壽官, 12대)의 자랑스러운 이름을 대물림하면서 가업과 한국식 이름 모두를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13대 심수관은 교토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총리 비서를 지낸 수재였지만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도공이 되었고, 14대 심수관 역시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가업을 잇기 위해 도공이 되었습니다. 14대 심수관이 도예가로서 전시회를 갖고 싶다고 했을 때 13대 심수관은 허황된 짓이라며 허락하지 않습니다.      


14대 심수관: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은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13대 심수관: 아들을 도공으로 만들어라.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었고, 네가 할 일도 그뿐이다.     


가업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토록 지독하고도 결연한 직업관을 한국인에게서 볼 수 있었던가요? 글쎄요. 고개가 가로어집니다.       


심수관가와 달리 도공의 우두머리, 박평의 가문은 박평의의 12대손 박수승이 도자로 번 돈으로 도고(東郷)라는 일본 성씨를 사들여 완전히 귀화했습니다. 그의 아들 박무덕이 바로 일본제국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이지요. 그가 1945년 히로히토 일왕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함으로써 종전을 이끌었다고는 하나, 진주만 폭격 당시 외무대신으로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20년 금고형을 받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A급 전범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어 있지요.          


수백 년 동안 간직해 온 고향을 잊고 완전한 일본인이 된 박평의 집안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 도공 가문의 후손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조선 도공의 후손이라고 해서 인류에 고통을 준 전쟁 범죄자를 동정해야 할까요? 당치 않은 일입니다. 또 심수관 가문이 한국식 이름과 가업을 지켜온 것에 감사할지언정 그들의 어머니의 나라, 일본은 무시한 채 한국인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논리도 옳지 않습니다. 심수관 가를 한일 우호의 상징이라며 한껏 이용하려는 정치권에도 경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 400년 전에 시작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고 수백년간 일본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지금의 한국이 또 정체성의 문제로 불편함을 주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들이 그리고 사쓰마야키가 가는 길을 묵묵히 응원할 뿐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심수관은 기자를 마을의 옥산궁(단군전)으로 이끕니다. 400년 전 조선 도공들이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했을 때 한밤중 바다 저편에서 화광(火光)이 날아와 이 산 꼭대기에 머물렀는데, 점을 쳐보니 화광은 단군의 신령으로 일행을 지키기 위해 백두산에서 날아왔다 전합니다. 화광이 머문 바위를 신주로 모시고 그곳에 사당을 만들어 음력 8월 보름날이면 단군제를 올리고 춤을 추며 한국어로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지요. 아래는 심수관 가에 전해지는 바로 그 노래입니다.    


오는 날 오는 날의 하루하루가

오늘 이날과 무엇이 다르리.

해가 지고 해가 뜬다. 오늘은 오늘.

한세상 어느 때나 같은 그날.     


『오노리소』라는 이 노래는 원래 고려가요 『청구영언』에 나오는 ‘오늘이 오늘이소서’라고 여겨지는데요, 소박한 삶에서도 ‘오늘’의 기쁨을 누렸던 넉넉한 마음과 여유를 표현한 이 노래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공들이 불렀다는 노래와는 느낌이 매우 다릅니다. 그들의 노래에는 체념과 쓸쓸함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마치 다른 노래인 듯 말이지요.


오나리 오날이쇼서(오늘리 오늘이소서)

마일에 오나리쇼서(매일이 오늘이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라시고(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라난(새더라도)

마양 당직에 오나리쇼서(늘 변함없이 오늘이소서)     


『청구영언』중에서


시바 료타로는 소설에서 한문으로 된『오노리소』의 원문 노래를 한층 더 애잔하게 해석합니다.     


오늘날이 오늘이라

매일이 또한 오늘이라

날은 지는데...     


옥산궁(단군전)은 메이지시대부터 일본식 신사로 바뀌었습니다. 차밭과 이끼 가득한 흙길을 지나 언덕으로 오르는 내 발걸음마다 조선 도공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내겐 너무 고가지만 욕심껏 심수관가의 사쓰마야끼 두 세트를 들여왔지요~


이로써 12편의 <규슈에 새긴 한국사> 시리즈의 막을 내립니다. 함께 달려가 주시고, 좋아요와 댓글로 응원, 채찍질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새해 모든 분들의 소망이 하나하나 이루어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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