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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Nov 28. 2023

땅끝 가고시마가 어떻게 일본 근대를 이끌었을까?

규슈에 새긴 한국사 10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40분, 기내 영화 한 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착하는 곳이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입니다. 가고시마까지 직항을 이용하면 편리하지만 나가사키에 들르기 위해 후쿠오카 공항으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나가사키와 가고시마까지는 기차를 이용하구요.       


에도 막부가 포르투갈(나중엔 네덜란드) 상인과의 무역을 통제하고 크리스트교 포교를 막기 위해 조성한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방문하는 것이 나가사키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이었지요. 조선에 억류되었던 하멜 일행이 제주, 강진과 여수를 거쳐 데지마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에 도착하기까지의 족적을 쫓은 <하멜은 왜 나가사키로 갔을까> 시리즈의 3편, ‘나가사키에는 짬뽕만 있는 게 아닙니다’에서 소개했습니다.


https://brunch.co.kr/@storybarista/26


이제 나가사키를  떠나 가고시마로 향합니다. 일본 기차여행에서 벤또(도시락)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기차역마다 ‘이런 걸 다 도시락으로?’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벤또가 판매되고 있으니까요.(고등어 초밥처럼 신선이 생명인 메뉴도 존재한다는!) 편리하고 쾌적한 JR과 신칸센(고속철)을 두루 이용해 2시간 40여 분! 드디어 가고시마 중앙역에 도착합니다.    


일본 철도는 우리와 달리 민영화되어 있어 비싼 편입니다. 비싼 만큼 쾌적하게 잘 관리되어 있지요.
나가사키에서 가고시마까지는 2시간 40분 가야하니 배를 든든히 하는 것이 좋겠지요? 취향저격 벤또입니다!


가고시마 앞바다 가고시마만은 게의 집게발 모양으로 바다를 품고 있어 마치 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비단결 같은 강이라는 뜻으로 긴꼬만(錦江灣)이라고도 부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비단결 강’이라 불릴 만한 바다가 있지요. 탁 펼쳐놓은 바짓자락처럼 생긴 육지 사이로 잔잔히 빛나던 전남 강진만의 바다가 딱 그랬으니까요. (옆길로 샐 뻔!^^;)         

           

규슈 가고시마 현은 게의 집게발 모양으로 바다를 품은 일본 열도의 최남단 땅끝마을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가고시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가고시마만 한가운데 주먹처럼 튀어나와 있는 살아있는 화산섬, 사쿠라지마(櫻島)입니다. 사쿠라지마의 세 산봉우리 중 미나미다케(南岳, 해발 1,040m)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입을 뻐끔거리며 하얀 연기를 몽글몽글 토해내는 모습은 한반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지요. 원래는 이름 그대로 섬이었지만 1914년의 대분화 이후 육지와 이어졌으니 지금은 반도라 해야겠습니다. 작은 분출이 일상으로 일어나다 보니 일기예보와 함께 화산 정보도 매일 전해지고, 고작 4km 떨어진 가고시마 시내까지 심심찮게 화산재가 날라와 쌓입니다.         

 

사쿠라지마의 화산 분출은 가고시마 시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입니다. 화산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이 말이지요.^^;


놀라운 것은 이 활화산의 대분화가 임박했다는 연구가 수도 없이 나오지만 정작 코앞에 살고 있는 가고시마시와 사쿠라지마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 이래 계속되어 온 이런 아름답고도 불안한 자연환경이 가고시마 사람들의 기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해집니다.  


우리 쪽 기록을 하나 소개할까요? 조선통신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에도 막부의 정치 상황, 문화 등을 기록한 『해유록(海遊錄』에는 그가 통역 겸 가이드였던 일본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와 나눈 흥미로운 질의응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신유한 : 일본인들은 삶을 가볍게 여긴다던데 사실인가?      

- 아메노모리 호슈 : 사람이 살고 싶고 죽기 싫어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다만 사쓰마(가고시마의 옛 이름)인들은 성격이 독특해서 예외인데, 일본인이 삶을 가볍게 여긴다는 건 바로 사쓰마인들 때문에 생긴 말이지요.      


엄격한 문치 사회인 조선의 유학자 신유한 눈에 일본의 사회상이나 법 제도가 무척 폭력적이고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본인의 기준에서도 매우 전투적인 사쓰마인이라니요! 알만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1587) 당시 도요토미에게 패하긴 했지만 사쓰마 군대는 규슈 통일을 노릴 정도로 강성했다 전합니다. 혼슈 본토의 막부와 충돌해 온 역사나, 독자적으로 진행한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정벌, 지난 글에서 언급한 최후의 사무라이 전쟁인 세이난(西南) 전쟁 등을 보더라도 사쓰마의 상무(尙武)적 기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이런 사쓰마 번을 대대로 다스려 온 것은 시마즈(島津) 가문입니다. 에도 막부 체제에서 1만 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에게 다이묘(大名)라는 호칭이 주어졌는데, 사쓰마 번의 시마즈 가는 70만 석이 넘는 영지를 소유한 막강한 다이묘였습니다. 척박한 화산지대이다 보니 곡물 소출은 그중 절반이었고 나머지는 고구마와 같은 상품 작물이나 어획량, 대외 무역 등을 환산한 것이었지요. 무엇보다 에도막부의 쇄국정책 속에서도 밀무역으로 번의 재정을 강화해 나갔는데, 값비싼 '사쓰마 도자기'와 '사쓰마 기리코(薩摩切子, 다홍색 유리)' 수출도 번의 수입에 큰 몫을 했습니다.      


규슈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은 지리적으로 서구세력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초입입니다. 1543년 중국 상선을 타고 온 포르투갈 상인이 조총을 전한 곳도, 그로부터 6년 뒤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가 가톨릭을 처음 전파한 곳도 바로 사쓰마니까요. 그 덕분에 일찍 개화사상이 일어나고, 서구에 눈을 뜬 개명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1809~58, 11대 번주)와 같은 선구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가신, 이치키 시로를 시켜 일본 최초의 사진을 찍게 할 만큼 서구 문명에 큰 관심을 보인 개명 번주였지요.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네덜란드를 통해 전해진 서양 문물에 심취했던 증조부 시마즈 시게히데의 영향을 받아 난학(蘭學)에 흥미를 가지며 서구 문명에 눈을 뜹니다. 1851년 번주로 취임하면서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의 기치를 내걸고 서구 벤치마킹에 박차를 가하지요. 그 결과 근대식 공업단지인 슈세이칸(集成館)이 탄생하는데요, 그곳에 용광로, 대포공장, 방직공장, 도자기, 유리, 제약, 설탕공장 등이 속속 들어섭니다.

  

특히 사쿠라지마에 세운 조선소에서 서양식 군함을 건조하고 이를 막부에 헌상하면서, 서양 배처럼 깃발을 올려야 한다며 일장기를 걸 것을 최초로 제안하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이듬해에는 자국산 증기 기관선을 건조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지요! 기술 개발을 위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시대를 연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인재를 길러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앞 글 '사쓰마(가고시마)로 떠나기 전 읽는 글'을 참조해 주세요.) 이 모든 일이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기 전, 막부의 쇄국정책 하에 일개 번에 불과했던 사쓰마가 주도한 일이라니 더욱 입이 떡 벌어집니다.-.-     


하지만 1858년 나리아키라가 세상을 떠나고 개혁이 주춤하는 사이 사쓰마는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영국과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 1863)을 치릅니다. 전쟁에 참패한 뒤 사쓰마 번의 행보는 더욱 놀랍습니다. 영국을 배워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청년 19명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지요. 에도 막부가 해외 도항을 금지한 시기였기에 밀항을 감행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서구 문명을 적극 흡수한 유학생들은 돌아와 일본 근대화에 앞장서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사쓰에이 전쟁은 사쓰마에 전화위복이 되었던 셈입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 미국과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치른 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나라 문을 더욱 꽁꽁 틀어 닫았던 조선과는 많이 달랐지요. 슬프게도 조선에는 시마즈 나리아키라 같은 세계적 시야를 가진 인물이 없었습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1865년 일본 최초로 영국 유학 간 19명의 사쓰마 청년들을 기린 동상, '젊은 사쓰마의 군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근대식 공장 슈세이칸(集成館)은 이제 쇼코 슈세이칸(常古集成館, 상고집성관)이라는 이름의 시마즈 가문 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둘러보아야겠지요? 또 쇼코 슈세이칸 바로 옆에는 1658년 지어진 시마즈 가의 아름다운 별저, 센간엔(仙巌園, 선암원,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위치하고 있으니 한 번에 구경하기로 합니다.


일본 최초의 근대식 공장인 슈세이칸(集成館)은 시마즈 가문의 역사자료관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내부는 사진 촬영 불가라 좀 아쉽습니다.
사쓰마 번에서 제조한 사정거리 3km의 철대포를 복원해 놓았는데 사쓰에이 전쟁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철대포 바로 위쪽에 대포를 만들던 용광로 터가 있지요.

  



시마즈 가의 오래된 성, 가고시마 성은 사쓰에이 전쟁으로 무너집니다. 이에 시마즈 가는 1884년에 별저였던 센간엔으로 옮겨와 어전을 추가로 짓지요. 그때부터 센간엔은 시마즈 가의 별저가 아닌 본가로써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센간엔은 바다와 사쿠라지마의 풍광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들여놓은 그야말로 Sea View의 해변 정원입니다. 건물(어전)보다는 정원이 압권이지요. 구불구불 요리조리 인공적으로 물길을 낸 곡수(曲水)와 죽림(竹林)에서 시마즈 가의 중국식 취미도 엿볼 수 있습니다. 어전 내부에는 마치 시마즈 가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것처럼 가재도구며 살림살이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습니다. 텅 빈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침전과는 달리 실감을 더하는군요.


선교를 위해 사쓰마에 도착한 하비에르 신부가 십자가모양 시마즈 가 문장 때문에  사쓰마가 크리스트교도들이 사는 곳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붉게 주칠된 석문을 지나 어전으로 들어갑니다. 센간엔을 축소해 집안으로 들인 듯 아기자기한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무념무상에 빠지지요.^^ 일본 건물은 참~ 직선적입니다!
아쉽게도 날이 흐려 센간엔이 품은 최고의 풍광인 사쿠라지마가 저 멀리 흐릿하게 보입니다. 꼭 보여드리고싶었습니다마는. ㅠ.ㅠ


센간엔을 산책하고 나오는 길에 언 몸을 녹일 겸 찻집에 들러 간장과 된장소스 맛의 당고와 차를 주문합니다. 달콤 짭짤한 당고가 장시간 답사로 방전된 몸에 에너지를 채워줍니다. 와~ 행복~^^     


센간엔의 어전과 정원을 산책한 후 즐기는 차와 단짠단짠 당고는 별미이고요.^^




이로써 일본의 근대를 이끈 메이지유신의 고향 가고시마(사쓰마)와 가고시마가 자랑하는 영웅들을 돌아본 두 편의 글을 마칩니다. 우리에겐 부러움과 질투와 안타까움일 수밖에 없는 역사였지만, 불편한 마음이니 외면해 버린다면 또다시 똑같은 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상,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안목을 가진 리더를 길러내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세계적 시야를 가지고 젊은이들을 이끈 가고시마의 영웅들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지요.

   

가고시마 답사의 마지막 글은 가고시마 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 미야마(美山) 답사여행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앞선 두 편의 글이 불편함이었다면 마지막은 벅참과 자랑스러움이 될거라 확신합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쓰마 도자기'의 고향, 미야마 마을로의 답사를 위해 작고 귀여운 자동차를 빌립니다. 함께 해 주실거지요?^^


미야마 마을로 달려갈 작고 귀여운 렌터카를 준비합니다.^^ (일본이 우핸들인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대부분 법제도와 사회 시스템을 영국으로부터 들여왔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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